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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7)-마태복음 7: 1~14
    2014-11-26 15:14:49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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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7)







    마태복음 7: 1~14





    예수님 산상수훈의 마지막인 마태복음 7장은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1절) 라는 비판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우리가 비판받지 않기 위한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기적으로 살아라, 계산적으로 살라는 말씀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바꾼다면 나에게 피해가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얼마든지 비판해도 된다는 말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 말씀은 이것만큼 좋지 않은 것도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이런 가르침이라면 기독교의 신앙을 신앙하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의 의미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 눈에 남의 허물이 보일 때 그 허물은 곧 나에게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 허물은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이 상대방의 것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라는 2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투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화 상영을 예로 든다면 영화관 스크린에는 많은 장면이 비치게 되고 영화 상영 내내 장면이 바뀝니다. 그런데 관객들 앞에 있는 스크린은 사실 흰색 하나밖에 없습니다. 흰색에 계속해서 다른 영상이 비추기 때문에 여러 가지 영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상은 스크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사기와 필름에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이처럼 나에게 있는 것이 상대방이라는 스크린에 비친 것입니다. 인간 사이에 일어난 수많은 갈등들은 투사로 말미암아 생긴다고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가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너무 괴롭기 때문에 외면하고 싶은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간절하게 가지고 싶지만 가지지 못하는 것, 이것을 그림자라고 표현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자 즉 상대방에게 괜히 질투하고 화를 내는데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갈등, 비판하는 것과 같은 문제는 사실 상대방의 문제라기보다는 나의 문제,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아주 극명한 예가 있습니다. 은행원인 젊은이가 불면증이 심하고 우울증이 심해서 정신과를 찾아갔는데 우선 드러나는 원인은 직장 상사의 문제였습니다. 함께 회사에서 일하는 상사가 악랄하게 그 사람을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환자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상사와 함께 일하는 것은 정말로 지옥 같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 사람의 상관은 직장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하직원들을 얼마든지 괴롭혀도 좋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환자를 치료하고 난 뒤 알게 된 것은 그 사람의 괴로움은 애꿎게 상관을 미워한데서 나오는 것뿐이었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상관은 이 사람과는 정반대로 현실적으로 아주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일할 때 아주 악착같은 사람입니다.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결론은 그 사람의 그런 것은 전혀 잘못이 없다는 것이고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가장 바라는 것이 바로 그 상관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성격, 그러한 처세였지만 자기는 그것을 도저히 가질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자기도 그런 태도, 그런 처세술을 한번 해보아야겠다고 시도도 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도저히 자기는 그렇게 살 수가 없었습니다. 정신과의 진단 결론은 자기가 못한 그 악착같음을 너무도 잘하는 그 상관이 미웠던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토록 심한 우울증에 걸려있는 까닭은 상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렇게 미워했던 상관의 처세술, 상관의 태도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자기의 마음이었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하라 하겠느냐’ 라는 3절과 4절 말씀은 바로 그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비판하고 뒤에서 험담할 것이 아니라 그런 시간이 있으면 너 자신이나 돌아보라는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외식’이라는 단어로 말씀하십니다. 연기한다는 것입니다. 연기하는 사람은 속과는 달리 각본에 충실할 뿐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사실 그 비판할 사항이 자기에게 있는데도 자기는 마치 그런 사람이 아닌 것처럼 연기하기 위하여, 위장하기 위하여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 연기 또는 외식이라고 표현합니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하면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추한 것, 못난 것, 허물을 감추고 가리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5절) 라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합니다. 비판할 일이 있으면 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스스로를 생각해보아야합니다. 혹시라도 그것이 곧 내 허물이고 내 부족함이 아닌지 자꾸 돌아보아야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모든 사람들을 무조건 다 이해하고 용납해야할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6절)



    사람 가운데는 도저히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아니라 개 혹은 돼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들까지 무비판적으로 대하고 무조건으로 용납하고 받아들일 것만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주님의 가르침을 모르고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혹은 나는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나도 상처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기독교 복음을 훼손시키는 일이 됩니다.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라는 6절 뒷부분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어서 12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라는 기독교의 황금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12절의 황금률을 보실 때 주의하실 것은 매 처음 ‘그러므로’ 라는 말씀입니다. 황금률만 따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앞 말씀과 관련해서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꼭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황금률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규칙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이런 원칙, 이런 원리를 적용하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만들어낸 규칙이 황금률입니다. 황금률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행위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라는 것이 원칙입니다. 즉 내가 싫다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는 것, 이것이 황금률입니다.



    이 황금률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도 있고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또 논어에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황금률에는 ‘모든 사람은 공정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 라는 지향하는 바가 있습니다. 대단한 철학입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우해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이 인간 이치를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 황금률이 지향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황금률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 주라는 것을 요구합니다. 말로만 배려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주의 깊게 다른 사람을 배려해주라는 것이 황금률이 여러분들에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남편 되시는 여러분들이 아내를 배려할 때 대강 또는 당연하게 배려한다, 또는 살아가는 자체가 배려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아내가 나에게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계속해서 생각하면서 그것을 배려해주는 것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이고 자식들도 마찬가지이고 교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주의 깊게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이것이 사랑이고 사실은 기독교 정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황금률은 상호관계의 도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황금률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이런 주의를 기울여야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라는 1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내가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내가 대접을 받기 위해서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런 식으로 가르치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이 대접을 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는 말씀일까요?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도 항상 주의 깊게 보아야합니다.







    이 말씀뿐만 아니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마다 찾아내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라는 7절, 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듣기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그대로 구하니까 반드시 받았습니까? 찾으니 반드시 찾았습니까? 사업의 문이 열리고 자녀들 대학의 문이 열리고 취업문이 열렸습니까? 주님 말씀에 주의를 가지고 보아야합니다. 이 말씀이 먼저 말씀하시는 바는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가? 관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 입니다. 이 말씀이 요구하는 것은 신자들이 관심을 가질 것, 시선을 둘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무엇을 받을 것인가? 내가 어떻게 하면 응답을 받을 것인가?’ 이런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 받을 수 있을지 내가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죽을 작정을 하고 매달리면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인지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시선을 여기에 둡니다. 어떤 경우에는 시선을 거의 여기에만 둡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의 시선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 기독교 신자가 요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시는 분인가?’ 그저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시선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씀으로 하면 우리 눈을 땅에 둘 것이 아니라 하늘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라는 이 질문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찾고 그렇게 원하고 절박할 때 우리 하나님은 그 요구를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든 여러분에게 길을 열어주시고 해결해주시고 여러분 소원을 들어주시려고 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듣기 참 좋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황금률에 대한 주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렇게 바라고 원하고 기대하는 그것을 절대로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어떻게 하면 여러분의 소원을 들어줄지 많은 애를 쓰는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면 그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기독교 신자들은 자기에게 요구하고 자기에게 원하는 사람, 자기에게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해야하겠는가? 바로 이 말씀이 기독교 황금률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입니다. ‘내가 무엇을 받을까?’ 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줄까?’ 바로 이것이 황금률의 핵심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도, 주님께서 ‘자기가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을 바라는 것처럼 자기도 다른 사람을 대접해주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자기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해야 마땅하지 않느냐? 만약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고 대접받기를 바라면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을 싫어하고 거부한다면 과연 그런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사람이 되겠는가?’ 라고 대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나는 바라면서 다른 사람에게 해주지 않는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황금률의 핵심입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이런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때서야 복을 주십니다. 그저 믿는다고, 달라고 한다고 요구한다고, 바란다고 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받을만한 사람이 복을 받아야 세상이 평화로워집니다. 그런 사람이 복을 받아야 가정이 좋아집니다. 세상이 좋아지고 나라가 좋아집니다.



    사람의 가치는 자기 자신이 만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도 자기가 그 자격을 만들고 가치를 만듭니다.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도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고 존경을 받는 것도 다 자기 자신이 만듭니다. 이 중요한 진리에 대해서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 가치는 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16-20절) 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삶이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지 입이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입은 다물고 귀만 열고 살아가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입을 열다보면 귀가 열리지 않습니다. 귀를 열다보면 입이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입을 열 것인지 귀를 열 것인지 택해야 합니다.







    내 가치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가치를 없앨 것인가? 가치 없는 사람으로 살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어떻게 살면 그런 가치 있는 사람, 그런 자격 있는 사람으로 살 것인가? 주님은 이것을 한 마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좁은 문을 생각할 때 고민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좁은 문을 그냥 쉽게 말하면 우리는 편하게 살면 안 되고 쉬운 길로 살면 안 되고 즐겁게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넓은 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럴까요? 꼭 힘들게 살아야 하고, 편하게 살면 안 되고 쉽게 살면 안 될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안 자고 안 먹고 힘들게 사서 고생하면서 살아야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뻐하라, 즐겁게 살아라, 하나님을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좁은 문은 특별난 것이 아닙니다. 대단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21절) 유달리 하나님께 달려들어서 주여 주여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22절).이런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억지로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시키는 대로 사는 그것이 좁은 문입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내가 바른 기독교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해서 살다보니 오늘날 기독교가 이렇게 많이 훼손되었고 다른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가라 하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는 그것이 좁은 문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하라고 하시면 하는 그것이 바로 ‘좁은 문’입니다. 특별히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고 하시면 하고 그만 하라고 하시면 하지 않는 그것이 좁은 길이고 좁은 문입니다. 그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조금 모자라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 주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것이 좁은 문이고 좁은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헤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24-27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말씀대로만 살면 됩니다. 주님께서 기독교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그것입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살아라, 여기에 생명이 있다 여기에 복된 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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