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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5)-마태복음 5: 38~48
2014-11-26 15:09:43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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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5)
마태복음 5: 38~48
초등학교 5학년 마지막 수업시간이었습니다. 그 수업이 끝나면 6학년이 되는 그날 선생님께서 강단에 올라가셔서 우리들에게 한문자 다섯 자를 쓰셨습니다. 사람 인(人)자 다섯 개였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들에게 그 뜻을 물으셨습니다.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물으셨지만 초등학교 5학년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설명하십니다, ‘사람아 사람아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그때는 무슨 말씀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고 난 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지나 신학교에 갔을 때 실천신학 강의시간에 강의를 맡으신 연로하신 목사님께서 조용하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강하게 일갈하시는 듯한 목소리로 ‘여러분, 목사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사람다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기독교인다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스스로 나는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분, 나는 기독교인답게 산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이 계시는지요? 착각만 아니라면 참 괜찮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기독교 최고의 가르침인 산상수훈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산상수훈을 통해서 기독교인은 이런 사람이 되어야한다, 이렇게 살아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보면 수준이 상당히 높습니다.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나중에는 변질이 되었지만 본래 바리새인들의 삶의 수준은 상당히 높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서기관들, 바리새인보다 기독교인의 삶의 수준은 더 높아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는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수준은 과하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하다, 과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주님이 명령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어렵다고 시작하지도 않아서는 안 됩니다. 불가능할 때는 불가능하더라도 시작해야하고 시도해야합니다. 조금 해보다가 힘들고 어렵다고 포기하고 뒤로 나앉을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또 다시 일어나서 시작하고 또 시도해야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시작하고 또 시작해야합니다.
법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세상 법을 지키는 것은 물론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법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표인 법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옛 사람에게 말한 바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라는 21절과 22절 말씀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세상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형제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도 안 된다, 비난을 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예수님의 법이고 기독교인의 법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것까지 지켜야한다는 말씀입니다 .혹시라도 실수로 화를 내고 형제에 대해서 비난했으면 만사를 제쳐두고 사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라는 23과 24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나한테 와서 인사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에게 인사하고 그것을 해결하고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 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라는 25절과 26절 말씀도 같은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 법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화내지 말고 비난하는 것까지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법이고 예수님의 법입니다.
간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음에 대해서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을 하였느니라’(27-28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안 좋은 마음을 가지고 여자를 보는 것도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고는 예수님께서 그저 한 번 말씀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무섭게 더 말씀하십니다.‘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29-30절)
세상 법을 훨씬 더 뛰어넘습니다. 아주 무섭게 말씀하십니다.
이혼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의 모든 통념을 뛰어넘었습니다. 그 당시 남자들은 여자를 마음대로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오래 전이지만 이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때는 남자들이 여자에 대해서 전혀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괜찮다는 남자들도 이혼 증서를 주기만 하면 여자를 마음대로 내 쫓아도 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뛰어난 법이지만 그것마저도 안 된다고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31-32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버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남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사람을 버려선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을 버려서는, 배우자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맹세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살다보면 맹세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33-34절) 라고, 맹세는 아예 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맹세가 필요할 때가 있음에도 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당시 사람들은 맹세 중에는 꼭 지켜야할 맹세가 있고 꼭 지키지 않아도 되는 맹세가 있다고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힘 있는 사람들, 잘 배운 사람들, 가진 사람들만 알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 못 배운 사람들, 없는 사람들은 꼼짝없이 당했습니다. 거기다 힘 있는 사람들은 지켜야하는 맹세를 하고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힘없는 사람들은 왜 그러는지 말도 한 마디 하지 못하고 늘 당하기만 했습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37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말씀하신 것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38절) 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이 부분에 대해서 별 의미를 두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법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내가 피해를 당하면 보복하고 싶은데 내가 당한 것 이상 보복하고 싶은 심리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구나 힘 있는 사람들은 힘없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보복했습니다. 그래서 늘 약한 사람들은 당했습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눈은 눈까지만, 이는 이까지만 보복하도록 만들었는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것마저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보복은 또 보복을 낳고 그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는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여기에 대해서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38-39절) 라고 악한 사람은 아예 상대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39-42절) 못된 사람들이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한 대 더 맞고, 속옷을 가지려고 하면 겉옷까지도 벗어주고,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까지 가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못된 사람들은 그냥 달라고 하면 안 줄 것 같으니 꾸어달라고 하는데 그때 떼일 것 알면서도 그냥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예 바보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신자들이 세상사는 법,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답게 사는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라고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죽는 것입니다. 즉 가장 기독교인답게 사는 것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죽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내가 죽었다고 말은 잘 하지만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왜 죽는지, 무엇을 위해서 죽는지, 어떻게 죽는지 알지 못하고 말만 잘합니다. 죽을 일을 위해서 죽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사는 법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말씀하십니다. 가장 기독교인답게 사는 것 즉 내가 죽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소금은 맛을 내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저는 가능하면 소금을 넣지 않고 먹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먹어도 먹을 만합니다. 그런데 어쩌다 소금을 넣으면 맛이 더 있습니다. 또 소금은 부패를 방지합니다. 빛은 또 얼마나 좋습니까? 어두운 곳을 밝혀줍니다. 참 좋지만 그 일을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희생입니다. 희생 없이는 그것이 안 됩니다. 소금이 녹지 않으면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고 자기의 그 무엇을 태우지 않으면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죽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닙니다.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이 기독교인의 삶이고 존재의미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기독교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좀 주의해서 볼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소금이다, 빛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소금 되어라 빛 되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13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14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자가 만약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즉 신자들이 세상을 위해서 자기희생을 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기독교인은 세상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이 이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기독교인이 희생하지 않으면 세상은 맛을 잃어버리고 빛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만약에 세상이 맛이 없고 재미가 없고 무엇이 썩었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책임이라는 말씀입니다. 잘 아십시오.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교회 책임이고 우리 책임이고 바로 여러분 책임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다른 교우들을 탓하고 교회를 탓하고 세상을 탓하는데 이는 기독교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만약 썩었다면, 잘못 되었다면, 맛이 없다면 내 탓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며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사람에게 비치느니라’(14-15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이 자기희생을 하게 되면 세상은 밝도록 되어있습니다. 세상은 맛나도록 되어있습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선교, 전도는 지상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선교, 전도란 어떤 것일까요? 지금도 우리 대원들이 에티오피아에 나가서 선교,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에티오피아에서든지 국내에서든지, 어디에서든지 간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것, 착한 일을 하는 그것이 곧 선교이고 전도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16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하면 기독교인은 일반적인 인간을 뛰어넘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3-33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이처럼 세상과 영 다릅니다. 또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 하느냐’(46-47) 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인 인간을 뛰어넘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팔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3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4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5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6절),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7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8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9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10절) 라고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시면서 이런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가만히 보면 여덟 가지 모두 결코 복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 그런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행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은, 행복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삶에 있습니다. 마치 망할 것 같이 자기를 희생하고 바보같이 사는 그곳에 복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위해서 더욱 힘쓰고 애를 써야 합니다. 참 쉽지 않습니다. 힘들 때도 있고 하기 싫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인간은 누구든지 그렇게 살 때, 자기를 희생할 때 행복합니다. 이것은 인간 깊숙이 있는 또 하나의 인간의 본성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주시는 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행복합니다. 그런데 행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그것뿐만 아니라 또 다른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때로는 기적을 주십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45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의 길은 좁습니다. 참되게 기독교인의 삶을 살면 힘들기도 하고 길이 좁습니다. 그러나 그 좁은 길에 생명이 있고 영광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복이 있습니다. ♥
마태복음 5: 38~48
초등학교 5학년 마지막 수업시간이었습니다. 그 수업이 끝나면 6학년이 되는 그날 선생님께서 강단에 올라가셔서 우리들에게 한문자 다섯 자를 쓰셨습니다. 사람 인(人)자 다섯 개였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들에게 그 뜻을 물으셨습니다.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물으셨지만 초등학교 5학년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설명하십니다, ‘사람아 사람아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그때는 무슨 말씀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고 난 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지나 신학교에 갔을 때 실천신학 강의시간에 강의를 맡으신 연로하신 목사님께서 조용하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강하게 일갈하시는 듯한 목소리로 ‘여러분, 목사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사람다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기독교인다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스스로 나는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분, 나는 기독교인답게 산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이 계시는지요? 착각만 아니라면 참 괜찮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기독교 최고의 가르침인 산상수훈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산상수훈을 통해서 기독교인은 이런 사람이 되어야한다, 이렇게 살아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보면 수준이 상당히 높습니다.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나중에는 변질이 되었지만 본래 바리새인들의 삶의 수준은 상당히 높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서기관들, 바리새인보다 기독교인의 삶의 수준은 더 높아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는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수준은 과하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하다, 과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주님이 명령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어렵다고 시작하지도 않아서는 안 됩니다. 불가능할 때는 불가능하더라도 시작해야하고 시도해야합니다. 조금 해보다가 힘들고 어렵다고 포기하고 뒤로 나앉을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또 다시 일어나서 시작하고 또 시도해야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시작하고 또 시작해야합니다.
법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세상 법을 지키는 것은 물론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법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표인 법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옛 사람에게 말한 바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라는 21절과 22절 말씀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세상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형제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도 안 된다, 비난을 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예수님의 법이고 기독교인의 법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것까지 지켜야한다는 말씀입니다 .혹시라도 실수로 화를 내고 형제에 대해서 비난했으면 만사를 제쳐두고 사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라는 23과 24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나한테 와서 인사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에게 인사하고 그것을 해결하고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 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라는 25절과 26절 말씀도 같은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 법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화내지 말고 비난하는 것까지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법이고 예수님의 법입니다.
간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음에 대해서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을 하였느니라’(27-28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안 좋은 마음을 가지고 여자를 보는 것도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고는 예수님께서 그저 한 번 말씀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무섭게 더 말씀하십니다.‘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29-30절)
세상 법을 훨씬 더 뛰어넘습니다. 아주 무섭게 말씀하십니다.
이혼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의 모든 통념을 뛰어넘었습니다. 그 당시 남자들은 여자를 마음대로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오래 전이지만 이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때는 남자들이 여자에 대해서 전혀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괜찮다는 남자들도 이혼 증서를 주기만 하면 여자를 마음대로 내 쫓아도 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뛰어난 법이지만 그것마저도 안 된다고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31-32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버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남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사람을 버려선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을 버려서는, 배우자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맹세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살다보면 맹세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33-34절) 라고, 맹세는 아예 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맹세가 필요할 때가 있음에도 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당시 사람들은 맹세 중에는 꼭 지켜야할 맹세가 있고 꼭 지키지 않아도 되는 맹세가 있다고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힘 있는 사람들, 잘 배운 사람들, 가진 사람들만 알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 못 배운 사람들, 없는 사람들은 꼼짝없이 당했습니다. 거기다 힘 있는 사람들은 지켜야하는 맹세를 하고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힘없는 사람들은 왜 그러는지 말도 한 마디 하지 못하고 늘 당하기만 했습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37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말씀하신 것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38절) 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이 부분에 대해서 별 의미를 두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법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내가 피해를 당하면 보복하고 싶은데 내가 당한 것 이상 보복하고 싶은 심리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구나 힘 있는 사람들은 힘없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보복했습니다. 그래서 늘 약한 사람들은 당했습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눈은 눈까지만, 이는 이까지만 보복하도록 만들었는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것마저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보복은 또 보복을 낳고 그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는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여기에 대해서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38-39절) 라고 악한 사람은 아예 상대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39-42절) 못된 사람들이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한 대 더 맞고, 속옷을 가지려고 하면 겉옷까지도 벗어주고,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까지 가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못된 사람들은 그냥 달라고 하면 안 줄 것 같으니 꾸어달라고 하는데 그때 떼일 것 알면서도 그냥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예 바보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신자들이 세상사는 법,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답게 사는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라고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죽는 것입니다. 즉 가장 기독교인답게 사는 것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죽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내가 죽었다고 말은 잘 하지만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왜 죽는지, 무엇을 위해서 죽는지, 어떻게 죽는지 알지 못하고 말만 잘합니다. 죽을 일을 위해서 죽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사는 법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말씀하십니다. 가장 기독교인답게 사는 것 즉 내가 죽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소금은 맛을 내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저는 가능하면 소금을 넣지 않고 먹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먹어도 먹을 만합니다. 그런데 어쩌다 소금을 넣으면 맛이 더 있습니다. 또 소금은 부패를 방지합니다. 빛은 또 얼마나 좋습니까? 어두운 곳을 밝혀줍니다. 참 좋지만 그 일을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희생입니다. 희생 없이는 그것이 안 됩니다. 소금이 녹지 않으면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고 자기의 그 무엇을 태우지 않으면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죽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닙니다.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이 기독교인의 삶이고 존재의미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기독교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좀 주의해서 볼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소금이다, 빛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소금 되어라 빛 되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13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14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자가 만약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즉 신자들이 세상을 위해서 자기희생을 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기독교인은 세상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이 이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기독교인이 희생하지 않으면 세상은 맛을 잃어버리고 빛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만약에 세상이 맛이 없고 재미가 없고 무엇이 썩었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책임이라는 말씀입니다. 잘 아십시오.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교회 책임이고 우리 책임이고 바로 여러분 책임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다른 교우들을 탓하고 교회를 탓하고 세상을 탓하는데 이는 기독교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만약 썩었다면, 잘못 되었다면, 맛이 없다면 내 탓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며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사람에게 비치느니라’(14-15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이 자기희생을 하게 되면 세상은 밝도록 되어있습니다. 세상은 맛나도록 되어있습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선교, 전도는 지상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선교, 전도란 어떤 것일까요? 지금도 우리 대원들이 에티오피아에 나가서 선교,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에티오피아에서든지 국내에서든지, 어디에서든지 간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것, 착한 일을 하는 그것이 곧 선교이고 전도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16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하면 기독교인은 일반적인 인간을 뛰어넘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3-33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이처럼 세상과 영 다릅니다. 또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 하느냐’(46-47) 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인 인간을 뛰어넘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팔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3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4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5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6절),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7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8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9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10절) 라고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시면서 이런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가만히 보면 여덟 가지 모두 결코 복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 그런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행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은, 행복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삶에 있습니다. 마치 망할 것 같이 자기를 희생하고 바보같이 사는 그곳에 복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위해서 더욱 힘쓰고 애를 써야 합니다. 참 쉽지 않습니다. 힘들 때도 있고 하기 싫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인간은 누구든지 그렇게 살 때, 자기를 희생할 때 행복합니다. 이것은 인간 깊숙이 있는 또 하나의 인간의 본성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주시는 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행복합니다. 그런데 행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그것뿐만 아니라 또 다른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때로는 기적을 주십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45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의 길은 좁습니다. 참되게 기독교인의 삶을 살면 힘들기도 하고 길이 좁습니다. 그러나 그 좁은 길에 생명이 있고 영광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복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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