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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6)-마태복음 6: 25~34
2014-11-26 15:11:07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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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6)
마태복음 6: 25~34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로 있을 때는 겸손하고 온유하다가도 다른 사람이 있으면 강한 채 하고 거드름 피우기도 하고 완악해지기도 하고 강퍅해지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이유는 나에 대한 인상을 좋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하든 나를 더 잘 보이려고, 내가 보이고 싶은 모습으로 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의식합니다. 의식하는 대상은 자기와 관계있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까지 때로는 불특정 다수에게까지도 의식합니다.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인데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번 스치고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그런 사람에게까지 의식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외식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겉치레입니다. 외식의 문제는 속과 겉이 다른 겉치장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속은 그렇지 않은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내는 것 이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겉을 거짓으로 장식한다는 말입니다.
이 외식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하나의 본성처럼 고정화되어버렸습니다. 굳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라는 오늘 본문의 2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5절에서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시고 6절에서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라고 은밀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16절에서도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라고 그 말씀을 하십니다.
외식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탐욕입니다. 쉽게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러나 실은 아주 무서운 탐욕입니다. 외식이 무서운 탐욕인 이유는 이 외식이라는 탐욕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인간은 절대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외식하는 한 자기라는 존재가 없습니다. 속에 있는 사람으로 살지 못하고 바깥 즉 내가 아닌 사람으로 살기 때문에 자기라는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동안에는 자기라는 존재를 찾지 못합니다. 자기를 잃어버린 인간에게 행복은 없습니다.
정신건강학적으로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 중 약하게 잃어버린 사람을 정신쇠약자라고 하고 많이 잃어버린 사람을 정신질환자라고 부릅니다. 주님께서는 기독교인들은 이 외식을 뛰어넘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1절에서 그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라고 말씀하시고 3절과 4절에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6절에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라고 말씀하시고 17절에서도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금식하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외식을 뛰어넘으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 외식을 뛰어넘는 문제는 인간에게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것이 길들여져 있고 하나의 경향이 되어있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고정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 행복을 가로 막는 외식을 뛰어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할 때는 외식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합니다. 무엇이든지 의식해야 하고 무엇이든지 의지해야하는 존재가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기왕 의식하고 의지할 바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신경 쓸 때 우리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외식의 경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이란 그냥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 않겠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언가 다른 그 무엇에 기대고 의식할 때에만 우리는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라는 6절입니다. 18절에서도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라고 그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인 우리 주님께서 기독교인인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이 모든 순간 하나님을 의식한다는 것은 하나의 신앙고백이고 내가 참된 기독교인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인생과 세상의 주인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다, 나는 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셨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이라는 고백이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을 쳐다보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란 이런 사람입니다. 세상 수많은 사람들과 살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면서 함께 살면서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참된 기독교인은 이 신앙의 자세, 늘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세가 실제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19-20절) 라고 보물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하시는 의미의 범위는 상당히 넓습니다. 그 이하의 말씀을 보면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말씀의 뜻을 알 수가 있는데 그 하나가 19절 첫마디 ‘너희를 위하여’ 라는 말씀입니다. 나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보관해두고 모아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즉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서 돈을 모으고 쓸 때에 그것이 곧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돈이든지 무엇이든지 좋은 것, 귀한 것들은 다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된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래서 참된 기독교인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 참된 기독교인들은 자기를 위해서 보물을 쓰지 못합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해서 ‘나를 위해서’ 쓰지 못 합니다. 물론 먹고 마시는 등 최소한의 것은 하나님께서 쓰라고 주셨지만 그 이외의 것은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불쌍한 이웃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참된 기독교인들을 세상 사람들이 보면 못나도 한참 못났습니다. 돈을 가지고도 쓰지 못합니다. 재산이 별로 없는 사람들도 자기를 위해서 잘 쓰는데 참된 기독교인들은 자기를 위해서 돈을 쓰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어떻게 생각하든, 나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참된 기독교인들은 자기를 위해서 보물을 쓰지 못합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라는 21절 말씀입니다. 보물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그렇게 살 때 즉 사람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식할 때 거기에는 놀라운 복이 있습니다. 우선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돈에 묶이지 않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는데 돈에 묶여 산다, 돈의 노예가 되었다, 돈에 끌려간다는 것은 너무도 적확한 표현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있고 돈에 끌려갑니다.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돈에 끌려서 삽니다. 돈이 넉넉하게 있음에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돈을 지키기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다 바치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나중에는 가족끼리, 형제간에 싸우게 되고 부모와 자식 간에 잘못된 일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반면에 참된 기독교인들 즉 사람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유를 누립니다. 그리고 자신감이 있습니다. 희한합니다. 그럴 때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니 하나님 또한 나를 바라보신다는 믿음,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참된 기독교인들은 행복합니다. 나의 자유, 자신감이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사람을 의식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생길 수 있는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언뜻 보면 승진이 더딜 수 있고 사람들에게 잘못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불이익을 우리 하나님께서 다 보상하신다는 사실, 이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냥 보상을 해준다면 손해 본 것에 대한 본전밖에 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 상까지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 군데에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4절에서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라고 보상해주신다는 말씀을 하시고, 6절에서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8절에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라고 보상해주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또 보상뿐만 아니라 상을 주시겠다는 말씀은 더 많습니다.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라고 1절에서 바르게 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 세상에서 받기 때문에 하늘에서는 받지 못하지만 바르게 살면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다고 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라는 5절 말씀은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고 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은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라는 16절 말씀도 마찬가지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확실한 약속입니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라는 19절 말씀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시면서 20절 첫머리에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 보물을 너희들에게 상으로 주고 갚아주겠다, 그것이 다 너희 것이 되게 하겠다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살다 손해 보는 일, 불이익 당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보상해주시고 거기다 상을 주십니다.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 하겠느냐’ 라는 22절과 23절 말씀은 약간 쉽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관건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1절의 ‘눈은 몸의 등불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첫 번째 부분입니다.
몸은 사람의 됨됨이입니다. 눈은 몸의 빛을 비춰주는 등불입니다. 그 사람의 눈이 어떻게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됨됨이가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22절 ‘ 눈이 성하면’ 이라는 말씀에서 ‘성하면’은 헬라어로 후하다, 관대하다는 의미의 ‘하플로스’입니다. 그리고 나쁘다는 헬라어 ‘포네로스’로 인색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박하다, 야박하다는 뜻입니다. 22절과 23절의 말씀은 사람의 눈이 너그럽고 손이 후하면 그 사람의 인생이 밝아지지만 반대로 사람의 눈이 인색하고 손이 야박하면 그 사람의 인생은 어두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신비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이상하다 동전 한 닢
움켜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 위에 가득 하네
움켜쥐는데 왜 없어지며 빌려주는데 왜 풍성하고 땅에 가득한지 상당히 비논리적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인간의 논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논리보다 훨씬 더 높은 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논리가 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논리가 인간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논리에는 인간의 모든 논리를 뛰어넘는 고차원의 논리가 있습니다. 사람이 가진 것은 원래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마차가지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내가 가지고 있다고, 내 돈이라고 내 소유인 것같이 살아가는 사람은 이상하게 그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 삶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희한합니다. ‘내 것이다, 내 인생이다, 내 시간이다, 내 돈이다, 내 입이다, 내 눈이다.’ 라고 마음대로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본래 그렇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눈도 귀도 재물도 다 하나님의 것인데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인생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인생이 밝지 못하고 어둡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내 돈도 내 인생도 내 모든 것은 전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이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습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리고 밝고 행복합니다.
또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라고 시작하는 25절 이하 말씀은 가진 것이 없고 생활이 힘든 사람에게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대상은 힘없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보다 먼저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25절 첫머리 ‘그러므로’ 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 앞에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신 후 그러므로 가진 자들은 나중을 대비하고 준비한다고 움켜쥐고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여기저기서 못 먹고 못 입고 못 배우고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넉넉한 마음으로 대하라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후하게 베풀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라는 25절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나누고 베풀고 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까지 주신 하나님께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 이것 정도야 알아서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돈이든지 시간이든지 이 모든 것이 진짜 누구의 것인지 알 때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이 안에 포함되어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회수해갈 때 알게 됩니다. 내 차라고 생각했는데, 내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내 소유뿐 아니라 모든 것, 내 생명까지도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꼭 집어서 말씀하신 것이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6-21)라고 우리 주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어서 말씀하시는 26절부터 그 이하의 말씀은 기독교인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선언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26절부터 31절의 말씀을 요약하면 나 하나님은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다, 나 하나님은 기독교 신자들의 아버지다, 너희들 기독교 신자들은 너희 할 일을 해라, 나는 내가 할 일을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33절 34절은 기독교 삶의 최고 지침입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여,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할 일을 하라, 나는 하나님으로서, 너희 아버지로서 내가 할 일을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럼으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리라’(33-34절) ‘내일이 염려할 것’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챙겨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을 들으십시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리라’(34절) 나머지는 다 내가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 25~34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로 있을 때는 겸손하고 온유하다가도 다른 사람이 있으면 강한 채 하고 거드름 피우기도 하고 완악해지기도 하고 강퍅해지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이유는 나에 대한 인상을 좋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하든 나를 더 잘 보이려고, 내가 보이고 싶은 모습으로 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의식합니다. 의식하는 대상은 자기와 관계있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까지 때로는 불특정 다수에게까지도 의식합니다.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인데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번 스치고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그런 사람에게까지 의식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외식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겉치레입니다. 외식의 문제는 속과 겉이 다른 겉치장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속은 그렇지 않은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내는 것 이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겉을 거짓으로 장식한다는 말입니다.
이 외식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하나의 본성처럼 고정화되어버렸습니다. 굳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라는 오늘 본문의 2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5절에서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시고 6절에서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라고 은밀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16절에서도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라고 그 말씀을 하십니다.
외식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탐욕입니다. 쉽게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러나 실은 아주 무서운 탐욕입니다. 외식이 무서운 탐욕인 이유는 이 외식이라는 탐욕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인간은 절대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외식하는 한 자기라는 존재가 없습니다. 속에 있는 사람으로 살지 못하고 바깥 즉 내가 아닌 사람으로 살기 때문에 자기라는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동안에는 자기라는 존재를 찾지 못합니다. 자기를 잃어버린 인간에게 행복은 없습니다.
정신건강학적으로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 중 약하게 잃어버린 사람을 정신쇠약자라고 하고 많이 잃어버린 사람을 정신질환자라고 부릅니다. 주님께서는 기독교인들은 이 외식을 뛰어넘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1절에서 그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라고 말씀하시고 3절과 4절에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6절에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라고 말씀하시고 17절에서도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금식하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외식을 뛰어넘으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 외식을 뛰어넘는 문제는 인간에게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것이 길들여져 있고 하나의 경향이 되어있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고정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 행복을 가로 막는 외식을 뛰어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할 때는 외식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합니다. 무엇이든지 의식해야 하고 무엇이든지 의지해야하는 존재가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기왕 의식하고 의지할 바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신경 쓸 때 우리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외식의 경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이란 그냥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 않겠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언가 다른 그 무엇에 기대고 의식할 때에만 우리는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라는 6절입니다. 18절에서도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라고 그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인 우리 주님께서 기독교인인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이 모든 순간 하나님을 의식한다는 것은 하나의 신앙고백이고 내가 참된 기독교인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인생과 세상의 주인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다, 나는 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셨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이라는 고백이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을 쳐다보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란 이런 사람입니다. 세상 수많은 사람들과 살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면서 함께 살면서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참된 기독교인은 이 신앙의 자세, 늘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세가 실제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19-20절) 라고 보물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하시는 의미의 범위는 상당히 넓습니다. 그 이하의 말씀을 보면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말씀의 뜻을 알 수가 있는데 그 하나가 19절 첫마디 ‘너희를 위하여’ 라는 말씀입니다. 나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보관해두고 모아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즉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서 돈을 모으고 쓸 때에 그것이 곧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돈이든지 무엇이든지 좋은 것, 귀한 것들은 다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된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래서 참된 기독교인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 참된 기독교인들은 자기를 위해서 보물을 쓰지 못합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해서 ‘나를 위해서’ 쓰지 못 합니다. 물론 먹고 마시는 등 최소한의 것은 하나님께서 쓰라고 주셨지만 그 이외의 것은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불쌍한 이웃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참된 기독교인들을 세상 사람들이 보면 못나도 한참 못났습니다. 돈을 가지고도 쓰지 못합니다. 재산이 별로 없는 사람들도 자기를 위해서 잘 쓰는데 참된 기독교인들은 자기를 위해서 돈을 쓰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어떻게 생각하든, 나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참된 기독교인들은 자기를 위해서 보물을 쓰지 못합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라는 21절 말씀입니다. 보물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그렇게 살 때 즉 사람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식할 때 거기에는 놀라운 복이 있습니다. 우선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돈에 묶이지 않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는데 돈에 묶여 산다, 돈의 노예가 되었다, 돈에 끌려간다는 것은 너무도 적확한 표현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있고 돈에 끌려갑니다.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돈에 끌려서 삽니다. 돈이 넉넉하게 있음에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돈을 지키기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다 바치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나중에는 가족끼리, 형제간에 싸우게 되고 부모와 자식 간에 잘못된 일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반면에 참된 기독교인들 즉 사람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유를 누립니다. 그리고 자신감이 있습니다. 희한합니다. 그럴 때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니 하나님 또한 나를 바라보신다는 믿음,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참된 기독교인들은 행복합니다. 나의 자유, 자신감이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사람을 의식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생길 수 있는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언뜻 보면 승진이 더딜 수 있고 사람들에게 잘못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불이익을 우리 하나님께서 다 보상하신다는 사실, 이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냥 보상을 해준다면 손해 본 것에 대한 본전밖에 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 상까지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 군데에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4절에서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라고 보상해주신다는 말씀을 하시고, 6절에서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8절에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라고 보상해주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또 보상뿐만 아니라 상을 주시겠다는 말씀은 더 많습니다.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라고 1절에서 바르게 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 세상에서 받기 때문에 하늘에서는 받지 못하지만 바르게 살면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다고 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라는 5절 말씀은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고 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은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라는 16절 말씀도 마찬가지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확실한 약속입니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라는 19절 말씀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시면서 20절 첫머리에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 보물을 너희들에게 상으로 주고 갚아주겠다, 그것이 다 너희 것이 되게 하겠다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살다 손해 보는 일, 불이익 당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보상해주시고 거기다 상을 주십니다.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 하겠느냐’ 라는 22절과 23절 말씀은 약간 쉽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관건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1절의 ‘눈은 몸의 등불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첫 번째 부분입니다.
몸은 사람의 됨됨이입니다. 눈은 몸의 빛을 비춰주는 등불입니다. 그 사람의 눈이 어떻게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됨됨이가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22절 ‘ 눈이 성하면’ 이라는 말씀에서 ‘성하면’은 헬라어로 후하다, 관대하다는 의미의 ‘하플로스’입니다. 그리고 나쁘다는 헬라어 ‘포네로스’로 인색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박하다, 야박하다는 뜻입니다. 22절과 23절의 말씀은 사람의 눈이 너그럽고 손이 후하면 그 사람의 인생이 밝아지지만 반대로 사람의 눈이 인색하고 손이 야박하면 그 사람의 인생은 어두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신비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이상하다 동전 한 닢
움켜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 위에 가득 하네
움켜쥐는데 왜 없어지며 빌려주는데 왜 풍성하고 땅에 가득한지 상당히 비논리적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인간의 논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논리보다 훨씬 더 높은 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논리가 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논리가 인간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논리에는 인간의 모든 논리를 뛰어넘는 고차원의 논리가 있습니다. 사람이 가진 것은 원래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마차가지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내가 가지고 있다고, 내 돈이라고 내 소유인 것같이 살아가는 사람은 이상하게 그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 삶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희한합니다. ‘내 것이다, 내 인생이다, 내 시간이다, 내 돈이다, 내 입이다, 내 눈이다.’ 라고 마음대로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본래 그렇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눈도 귀도 재물도 다 하나님의 것인데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인생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인생이 밝지 못하고 어둡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내 돈도 내 인생도 내 모든 것은 전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이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습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리고 밝고 행복합니다.
또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라고 시작하는 25절 이하 말씀은 가진 것이 없고 생활이 힘든 사람에게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대상은 힘없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보다 먼저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25절 첫머리 ‘그러므로’ 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 앞에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신 후 그러므로 가진 자들은 나중을 대비하고 준비한다고 움켜쥐고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여기저기서 못 먹고 못 입고 못 배우고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넉넉한 마음으로 대하라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후하게 베풀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라는 25절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나누고 베풀고 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까지 주신 하나님께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 이것 정도야 알아서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돈이든지 시간이든지 이 모든 것이 진짜 누구의 것인지 알 때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이 안에 포함되어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회수해갈 때 알게 됩니다. 내 차라고 생각했는데, 내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내 소유뿐 아니라 모든 것, 내 생명까지도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꼭 집어서 말씀하신 것이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6-21)라고 우리 주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어서 말씀하시는 26절부터 그 이하의 말씀은 기독교인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선언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26절부터 31절의 말씀을 요약하면 나 하나님은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다, 나 하나님은 기독교 신자들의 아버지다, 너희들 기독교 신자들은 너희 할 일을 해라, 나는 내가 할 일을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33절 34절은 기독교 삶의 최고 지침입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여,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할 일을 하라, 나는 하나님으로서, 너희 아버지로서 내가 할 일을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럼으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리라’(33-34절) ‘내일이 염려할 것’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챙겨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을 들으십시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리라’(34절) 나머지는 다 내가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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