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에스라강단
확장변수1 |
---|
친부모와 자식, 그 어떤 친형제보다 더 깊고 뜨거운 사랑
히브리서 13:20~24
바울은 선교 일생 여러 번 감옥에 갇힙니다. 마지막 두 번은 다 로마 감옥입니다. 첫 번째 로마 감옥에 갇힌 것은 사도행전에 잘 기록되어있습니다. 거기서는 감옥이라는 말은 쓰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로마 감옥 투옥은 첫 번째 투옥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분위기가 살벌했고 이번에는 도저히 석방되지 않고 아무래도 처형될 것 같았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바울에게 감옥 밖으로부터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기독교 신자 가운데 기독교를 떠나서 유대교로 돌아간 사람이 제법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가슴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바울은 ‘이 좋은 기독교를 두고 어떻게 유대교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모를 수 있는가..’ 탄식하면서 편지를 씁니다. 바울이 유대교와 기독교를 대표적으로 비교한 몇 가지입니다.
유대교인들이 유대교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유대교에는 위대한 선지자들이 많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 종교인가를 말합니다. 바울은 거기에 대해서 말합니다.
‘선지자들이 많이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만약 그 선지자들이 완전했다면 한 사람만 있어도 되었을 텐데 많이 있다는 것은 그 선지자들에게 무언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의 한 분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하십니다.
두 번째, 유대교에는 천사들이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바울은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천사들은 어떤 존재들입니까?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존재 즉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십니다. 천사는 감히 그리스도와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유대교에는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있다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일을 하는 집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도 다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 주인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의 집 주인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네 번째, 유대교인들은 여호수아를 자랑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민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복락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이스라엘의 장군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수아도 대단한 존재이지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한 가나안에 완전한 안식이 있었습니까? 영원한 안식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가나안에는 끊임없이 전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기독교의 그리스도가 주는 안식은 영원한 안식이고 완전한 안식입니다.’
다섯 번째, 유대교는 대제사장을 자랑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대제사장은 참으로 귀한 분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귀한 대제사장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제사장과 감히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첫 번째, 유대교 대제사장은 모세 시대에 처음으로 생겼다, 모세의 형인 아론이 첫 번째 대제사장으로 유대교의 대제사장은 아론을 시조를 하는 대제사장 제도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그리스도는 아론보다도 500년 이전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친 멜기세덱을 시조로 하는 대제사장인데 어떻게 몇백 년 뒤에 나온 아론의 후예들인 대제사장과 몇백 년 전에 출발한 멜기세덱의 후예인 그리스도와 대비되느냐? 두 번째, 유대교의 대제사장은 항상 백성들을 위해 제사드리기 전에 먼저 자기 죄를 깨끗하게 하지만 기독교의 그리스도는 한 번 십자가에 죽음으로 더 이상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시니, 이 어찌 비교가 될 수 있겠는가?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바울은 이미 노쇠했습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히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있을 때 그 곁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시도 바울 곁에서 떨어지지 아니한 사람 누가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저런 사유로 바울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몸도 시원찮은 어르신이 자주 병으로 고생하는데 의사인 나는 바울님 옆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의사가 되게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일을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든 바울 같은 사람 곁에 있으면 힘듭니다. 고생만 하고 죽을 위험이 순간순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한 번도 떠나지 아니하고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이런 사람인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의 역사를 거의 누가가 썼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역사를 쓰면서 자기 이름을 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사람입니까? 틈만 나면 내 자랑하고 싶고 내 이름 내고 싶고 내 얼굴 드러내고 싶어 하는 세상에 누가는 그렇게 헌신하면서도 자기 이름을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의사이고 문필가이고 역사가입니다. ‘상당히 대단한 사람’입니다. 할 일도 많고 오라는 곳도 많은 사람이 누가였지만 누가는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라고 오늘 나로 만들어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바울에게 이렇게 사랑스러운 누가 이외 바울을 참으로 사랑하고 또 바울이 사랑하는 한 사람이 더 있습니다. 디모데입니다. 바울은 처형되기 바로 전 인생의 마지막에 디모데가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망설였습니다. 자기가 중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가 자기에게 왔다가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보고 싶은 마음을 끝내는 억제하지 못하고 편지를 쓰게 됩니다. ‘디모데야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당시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디모데는 그 편지를 받자마자 만사를 제쳐두고 로마에 달려가서 감옥에 있는 바울을 만났습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러나 그 감격도 잠시뿐이었습니다. 바울의 재판에 디모데가 참석하게 됩니다. 재판 진행 과정에서 로마 당국은 로마 대화재의 의혹의 시선을 네로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바울에게 온갖 죄목을 억지로 갖다 붙였습니다. 디모데가 법정에서 참지 못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런 억지 죄를 덮어씌우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 일로 디모데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런 디모데 그리고 누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바울은 로마 대로에서 참수가 되었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쓰다만 편지를 가지고 디모데가 목회를 하고 있던 에베소에 가서 바울의 편지를 완성했습니다. 슬픔에 겨워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던 누가의 마음을 밝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 재판 때 바울 때문에 감옥에 갇혔던 디모데가 풀려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23절) 이 말은 한국말을 보아도, 영어를 보아도, 원어를 보아도 디모데가 석방된 것에 대한 누가의 기쁨이 가득 담겨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바울의 제자들 간의 사랑입니다. 바울과 누가 그리고 디모데는 혈육 간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남남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관한 한 그 어떤 아버지와 자식, 그 어떤 친형제보다 더 깊고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본래의 기독교 사랑입니다. ♥
[생각해 봅시다]
1. 나는 세상 모든 것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을 자랑합니까? 세상의 것들을 자랑합니까?
2.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 주님의 일에 동역할 수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3. 나에게, 주님의 제자로서 사랑을 나눌, 누가와 디모데가 있습니까? 또한 나는 누군가에게 누가와 디모데가 되고 있습니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