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에스라강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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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고 대접을 받는 사람들..
마태복음 7:1~14
예수님 산상수훈의 마지막인 마태복음 7장은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1절) 라는 비판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우리가 비판받지 않기 위한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기적으로 살아라, 계산적으로 살라는 말씀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바꾼다면 나에게 피해가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비판해도 된다는 말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의 의미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 눈에 남의 허물이 보일 때 그 허물은 곧 나의 허물이요, 어쩌면 그 허물은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인데 상대방의 것으로 보일 뿐이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비판은 상대방의 문제라기보다는 거의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하라 하겠느냐’라는 3절과 4절 말씀이 그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비판하고 뒤에서 험담할 것이 아니라 그런 시간이 있으면 너 자신이나 돌아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외식外飾’이라는 단어로 말씀하십니다. 연기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하면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추한 것, 못난 것, 허물을 감추고 가리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연기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할 일이 있으면 나를 돌아보고 스스로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남의 허물이 나의 허물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모든 것을 무조건 다 이해하고 용납해야 할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6)
사람 가운데는 도저히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아니라 개 혹은 돼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들까지 무 비판적으로 대하고 무조건 용납하고 받아들일 것만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주님의 가르침을 모르고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혹은 ‘좋은 사람’ 되려는 생각으로 무 조건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로 인해서 나도 상처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기독교 복음을 왜곡시키는 일이 됩니다.
이어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기독교의 황금률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주의할 것은 ‘그러므로’라는 말씀입니다. 황금률만 따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앞 말씀과 관련해서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황금률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라는 것이 바탕에 있습니다. 또 내가 싫다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는 것, 이것이 황금률입니다.
황금률에는 ‘모든 사람은 공정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지향점이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우해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이 이치를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 황금률이 지향하는 바입니다.
황금률은 다른 사람들 배려를 요구합니다. 말로만 배려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주의 깊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는 것이 황금률이 요구하는 바입니다.
주의할 것은 이 말씀뿐만 아닙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마다 찾아내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 그대로 구하니까 반드시 받았습니까? 찾으니 반드시 찾았습니까?
이 말씀이 말씀하시는 바는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가? 관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 입니다. 이 말씀이 요구하는 것은 신자들이 관심을 가질 것, 시선을 둘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무엇을 받을 것인가? 내가 어떻게 하면 응답을 받을 것인가?’ 이런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의 시선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신자가 요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시는 분인가?’ 그저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시선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그렇게 찾고 그렇게 원하고 절박할 때 우리 하나님은 그 요구를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 길을 열어주시고 해결해주시고 신자들의 소원을 들어주시려고 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의 황금률에 대한 주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렇게 바라고 원하고 기대하는 그것을 절대로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어떻게 하면 여러분의 소원을 들어줄지 많은 애를 쓰는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면 그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기독교 신자들은 자기에게 요구하고 자기에게 원하는 사람, 자기에게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겠는가? 이것이 기독교 황금률의 핵심입니다. ‘내가 무엇을 받을까?’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줄까?’ 바로 이것이 황금률의 핵심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을 바라는 것처럼 자기도 다른 사람을 대접해주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자기가 대접받고 싶은 것처럼 자기도 다른 사람을 대접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만약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면서 자기는 다른 사람 대접하는 것을 싫어하고 거부한다면 과연 그런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사람이 되겠는가?’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나는 바라면서 다른 사람에게 해주지 않는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겠는가?’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황금률의 핵심입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이런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사람의 가치는 자기 자신이 만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도 자기가 그 자격을 만들고 가치를 만듭니다.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도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고 존경을 받는 것도 다 자기 자신이 만듭니다. 삶이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지 입이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살면 그런 가치 있는 사람, 그런 자격 있는 사람으로 살 것인가? 주님은 이것을 한마디로 하시는 말씀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좁은 문은 특별난 것도 아니고 대단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시키는 대로 사는 그것이 좁은 문입니다. 주님께서 가라 하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는 그것이 좁은 문입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하라고 하시면 하는 그것이 바로 ‘좁은 문’입니다. 특별히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님 시키시는 대로 살아라, 여기에 생명이 있다. 여기에 행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
[생각해 봅시다]
1 허물을 봤을 때 기독교인이 취해야할 자세는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2 말씀에 타인을 비판하는 행위를 무엇이라 정의하시며, 그런 행위가 왜 발현되는지 생각해봅시다.
3 응답 받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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