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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려하지 말라 (누가복음 12:22-28)
    2024-06-07 10:14:56
    관리자
    조회수   90

       염려하지 말라

     

     

    누가복음 12:22-28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의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것이고,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들에 대한 것이고,  22%는 사소한 고민이고, 또 4%는 우리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것들에 대한 것이고, 그리고 걱정의 4%만 우리 가 해결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다.” 즉 우리가 하는 걱정의 96%는 쓸데 없는 걱정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바로 전에 한 예수님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사람 역시 염려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고심하다가, 그가 택한 방법은 근 심하고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이 쌓아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국 그의 바램대로 농사가 잘되어 풍성한 소출을 거둡니다. 농사가 얼마나 잘 되었던지 곳간을 헐고 다시 지어야 할 만큼 잘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걱정이 없고, 염려가 없을 거라 생각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 워 하자’ 당시 예수님 시대에 먹을 것을 여러 날도 아니고 여러 해를 쌓아두었 다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부자는 이제 앞으로 걱정할 것이 하 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부자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그의 행동이 어리석다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부자를 오늘밤에 그를 데려가시면 지금까지의 그의 모든 수고가 헛수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평생 염려만 하고, 고생한 하다 끝나는 허무한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자의 방법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취하는 방법입니다. 넉넉한 집이 있으면, 넉넉한 은행잔고가 있으면, 안정된 직장이 있으면 우리의 염려가 그칠 줄 압니다. 그래서 더 큰 곳간을 짓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게 그런 인생은 ‘어리석은 인생’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바로 ‘염려를 그치라’는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22절입니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예수님은 먼저, 하고 있는 모든 염려를 ‘지금 그치라’고 하십니다.  22절에서 ‘염려하지 말라’라는 말은 단순히 권유형이 아니라, 문법적으로 보면 ‘지금당장 염려를 그쳐라’하는 매우 시급하고 단호한 명령으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염려’라는 단어의 뜻은 ‘나누어지다’, ‘분열되다’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한 곳에 모이지 않고, 분열되는 것이 곧 염려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이것저것 염려다보면 결국에는 하나님께도 마음을 온전히 두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결국 신앙생활에도 종교적 형식만 남게 됩니다. 

     이들이 신앙이 없어서 그런게 아닙니다. 신앙이 있어도 현실은 염려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압제하에 있었던 유대사회는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불안했습니다. 세금은 갈수록 무거워지고, 세리들과 군인들의 합법적, 불법적 약탈은 갈수록 심해지고, 굶지 않으려면 도둑질 까지 해야 하는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종교까지 타락해갔습니다. 어느 하나 불안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마주하면, 염려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든 상황을 다 아심에도 불구하고 ‘염려를 지금 당장 그치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근거와 대책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제 예수님은 논리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염려하지 말아야할 이유를 설명을 하십니다.

      염려를 그쳐야하는 첫 번째 이유는 ‘삶’이라는 것은 단순히 먹고 사는 생존에 관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3절에 말씀에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요하니라”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영혼의 문제, 생명의 문제가 있기에 그것을 더 신경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왜 먹고사는 걱정이 괜한 염려인지를, 까마귀와 백합화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십니다. 

       까마귀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그렇다고 양식을 저장해놓을 창고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까마귀는 굶어죽지 않습니다. 항상 어디선가 먹이를 잘 찾아 먹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까마귀를 예로 드신 까닭은, 율법에서 까마귀는 죽은 짐승의 사체나 뜯어먹는 부정하고 불결한 짐승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부정한 짐승도 입히시고 먹이시는데, 하물며 까마귀보다 더 거룩하고 정결한 너희를 돌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백합화를 보라 하십니다. 백합화는 의미상 여기저기 들판에 널려있는 잡다한 모든 야생화들을 말합니다. 즉 백합화가 의미하는 것은 흔하고 하찮은 것들입니다. 잠시 피었다가 말라버리면 아궁이에 던져질 그런 하찮은 것들이지만, 그러나 꽃이 피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각각 다 입히십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것들 보다 더 귀한 너희들을 돌보시지 않겠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까마귀조차도 먹이시고, 하찮은 백합화조차도 입히셨으니 그것들 보다 더 귀한 너희를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겠느냐? 그러니 염려할 것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염려를 그쳐야하는 두 번째 이유를 2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키’는 신체크기를 말하지만 여기서는 ‘생명’을 뜻합니다. 또한 ‘한 자’는 약 50센티 길이이지만 여기서는 수명을 의미합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수명을 늘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이 결정하시고,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러니 ‘죽고 사는 것도 염려해봤자’ 라는 말씀입니다. 
     부정한 새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하찮은 풀도 하나님이 입히시고, 죽고사는 것도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니, 예수님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세 번째 이유는 염려는 불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많은 것을 염려하지만 우리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염려를 하고 걱정을 하게 됩니다. 물론 염려를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걱정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습관적인 염려, 염려를 지속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크나큰 해가 됩니다. 출애굽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직후부터 죽을 때 까지 했던 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하나님이 먹이시지 않을 까봐 염려했고, 마실 물을 주시지 않을까봐 염려했고, 지켜주시지 않으실까봐 염려했습니다. 광야인생 40년의 시간동안 염려만하다 결국 불순종으로 망한 이야기가 출애굽 1세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굶기신 적이 단 한번 도 없으시며, 그들을 입히지 않으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고, 그들을 떠나신 적도, 지켜주지 않으신 적도 단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주께서는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주의 만나가 그들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목마름을 인하여 그들에게 물을 주어 사십 년 동안 들에서 기르시되 부족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사오며”
      광야는 음식과 의복을 구할수 없는 척박한 땅입니다. 그 땅을 지나오면서도, 하나님은 40년 동안 매순간 그들을 입히시고 먹이셨지만,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주셨던 모든 은혜를 다 잊고, 또 다시 내일을 염려하며 불평하였습니다. 염려가 습관이 된 것입니다. 습관적인 염려는 하나님께 대한 의심으로 자라고, 그 의심은 결국 불신앙을 낳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염려를 ‘지금 당장 그쳐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염려를 그쳐야 할 이유를 말씀하셨다면, 이제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현실의 문제에 대한 염려를 그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염려를 그치는 방법에 대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먼저는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염려나 근심에 집착하지 말라 하십니다. 29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염려하지 않기 위해서 ‘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도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으면 구해야 하고, 직장문제, 결혼, 건강문제로도 기도해야합니다. 
     이 ‘구하다’는 단어에는 ‘추구하다’, ‘마음을 그 위에 정착시키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하지 말라 하신 것은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근심하지 말라’는 의미도 비슷합니다. ‘근심하다’는 헬라어로 ‘함께 매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근심은 우리의 마음을 ‘염려에 매다는 것’입니다. 염려에 마음이 매였으면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히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마음이 요동치고 괴롭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문제에 집착하고, 하루 종일 염려로 매여 사는 것은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들의 삶이라고 하십니다. 30절 말씀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줄 존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해결을 위해 스스로 거기에 집착하고, 근심하고, 매여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고아가 아니다.’고 하십니다. ‘너희에게는 아버지가 있다’고 하십니다. 30절 후반절에 “너희 아버지께서는...” 원래 이 말 앞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생략되어있습니다. 살려서 읽으면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는... ”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지만 그러나 너희에게는 아버지가 계시며, 또한 그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들을 이미 다 알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세상에는 세상 나름의 법칙이 있습니다. 염려가 찾아오기 전에 부자처럼 미리 필요한 것, 쓸 것들을 힘써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우리도 성실함으로 취해야할 자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알고 살면 어리석은 부자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성도들에게는 세상을 사는 법칙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채워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세상은 콩을 얻기 위해서는 콩을 심어야하고, 팥을 얻기 위해서는 팥을 심어야 합니다. 내 집 앞마당에서 열매를 얻고 싶으면 내 집 앞마당에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논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길 말고 더 높은 길이 있다하십니다.
       이사야 55:9에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은 남의 집 앞마당에다 씨앗을 심어도, 우리 집 앞마당에 열매가 맺어지게 하십니다. 오히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더 부하게 되는 일이 있고, 움켜쥐어도 가난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려면 스펙을 쌓기 보다, 먼저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며, 땅의 기업을 넓히기 위해서 동분서주할 것이 아니라, 먼저 온유한 자부터 되라 하십니다. 논리적으로는 하나도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삶으로 살다보면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논리와 이성을 넘는 채워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모른다면 어떻게 이런 삶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길은 하나님이 내시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따라갈 수 없고, 믿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염려가 찾아올 때 하나님 없는 백성들처럼 살지 말고 아버지 하나님을 경험하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길이 아닌 더 높은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 길이 바로 31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염려를 그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먼저 구해야할 그의 나라는 무엇일까요? 3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이 일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신명기 10:18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그런데 그 일을 우리가 대신 행하면 성경은 그것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말이 좀 어색하지만 우리가 가난한 자를 도우면, 그것은 하나님께 빌려드리는 것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해주시고 우리에게 갚아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돈이 많고 넉넉한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도, 지금 쓸 것이 마땅치 않은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말씀임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절대 가난한 자들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히려 성도들은 모든 것을 다 가진 부요한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스스로 가난하다고 여기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깨우칩니다.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은 없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이미 다 주셨습니다. 구원도, 생명도, 그리고 예수그리스도 까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게 우리가 부요하게 살 수 있는 이유입니다.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29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 건축설계회사의 중역이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참 성공의 가도를 달리던 중 그의 나이 34세에 갑자기 건강에 이상 신호가 생깁니다. 병명은 ‘심실빈맥증’ 심장박동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뛰는 병입니다. 한동안 심장에 기계를 달고 살았지만 더 이상 약으로만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죽음의 통증이 몰려왔고, 호흡곤란으로 쓰러져 응급실 행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내와 어린 두 딸을 생각하면 앞이 막막했습니다. 이대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 10억원이 넘는 보험금도 바닥난 상태, 칭얼거리는 어린 두 딸과, 자신까지 간호해야하는 아내, 그 속에서 그는 ‘차라리 아내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었더라면, 두 딸이 태어나기 전에 이런 일을 당했더라면...’ 자신의 불행으로 인해 가족까지 불행해지는 것을 보는 것은 자신의 아픔보다 더욱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심장병동에 입원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노는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원망스러운 하나님 밖에 없음을 알게 되자 또 눈물이 흘렀습니다. 
      다른 사람의 심장을 기다리는 5개월 동안,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서너 시간씩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 까지 꼼꼼히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 한다면, 이웃을 사랑해라’였습니다. 이 사실을 머리가 아닌 온몸의 전율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이웃들에게 무관심했던 자신의 삶이 얼마나 위험한 삶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일 살아서 이 병원을 나간다면,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겠다고 서원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에게 이식할 심장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아내와 어린 두 딸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수술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그는 우연찮게 담당의사로부터 옆방에 있던 여성환자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녀가 이틀 안으로 심장이식 수술을 받지 못하면 죽게 된다는 소식과, 그녀가 필요한 심장이 자신의 심장과 같은혈액, 같은압력, 같은 사이즈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순간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순간 멍해졌습니다. 죽어가는 순간 그 여인의 생사가 걱정된 것입니다. 그가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박사님, 저 여인이 수술을 받지 못하면 정말 이틀내에 죽습니까?”
    “네 이틀을 못 넘깁니다.”
    “그러면 제가 만일 오늘 이식수술을 받지 못하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습니까?”
    “일주일입니다. 잘 견뎌야 한 달 정도 살 수 있습니다.”

      그는 기가 막혔습니다. 그토록 기다린 이 심장은 자신의 것이고, 아내와 어린 두 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이때 마음속에 자꾸 깨달았던 진리가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죽어가는 저 여인에게 너의 심장이 필요하다.’ 그 음성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의사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에게 이 심장을 주십시오.’ 의사는 뻘쩍 뛰며 말렸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결정하였습니다. 결국 그 여인이 대신 이식을 받고 그는 일주일 후에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그런데 그가 사경을 헤매는 사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불평과 싸움의 소리가 줄어들고, 서로 배려하려는 모습들이 많아졌습니다. 날마다 서로 그가 아직 살아있는지 안부를 물으며 종교가 달라도 함께 그를 위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신론자였던 그의 주치의도 평생 처음으로 그가 믿는 하나님께 날마다 그를 살려달라고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한 달 뒤 정말 기적적으로 그에게 맞는 심장이 나타났고, 수술은 잘 되어 무사히 퇴원하게 됩니다. 그는 지금도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채워줄 때, 자신의 삶과 주변을 더 풍성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삶속에서 경험하며 나누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 동부의 메이저 건축설계회사인 팀하스의 설립자인 하형록씨의 이야기입니다. 


      염려를 그치는 방법은 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움츠려 들수록 더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다리며 경험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에 집착하고 매여있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인생을 살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앞선 말씀처럼 부정한 짐승 까마귀도 먹이시고, 하찮은 들풀도 조차 입히시는데, 하물며 우리를 모른체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앞날은 우리의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우리의 앞날은 주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하나님이 없는 자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살라고 하십니다.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고, 주라 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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