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초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시편 137:1-9
조선 땅을 밟은 선교사들이 많지만 우리가 기억해야할 선교사가 있습니다. 바로 헐버트 선교사입니다. 그의 별명은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선교사’입니다. 헐버트 선교사는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893년 9월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조선 사람보다 더 조선을 사랑하면서 자신의 젊음을 조선을 위해서 불태웠습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우상숭배, 미신, 첩 생활 등 해결해야할 많은 문제들이 있었지만 헐버트는 그런 불쌍한 조선인들까지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심지어 사역하던 중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어 죽는 아픔을 겪었지만 결코 조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헐버트는 사랑하는 아들 대신 모든 조선인을 자신의 아들로 삼기로 했고 자신도 조선 땅에 묻히기로 결단했습니다.
일본과 을사늑약이 체결될 무렵 고종황제는 헐버트 선교사를 밀사로 보내어 조선이 국권을 침해당하고 있으며, 열강의 틈바구니에 시달리고 있음을 세계 각국에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헐버트는 즉시 황제의 요청을 받아들여 고종의 친필을 들고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 미국과 일본이 <카츠라 태프트> 밀약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밀약의 핵심은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 한다는 것이었고 결국 그는 백악관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문전 박대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조선과의 신의를 저버린 자신의 조국에 배신감을 느끼면서 귀국하였습니다.
조선이 겪어야할 설움을 몸소 겪으면서 헐버트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헐버트는 자신이 조선을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될 것을 결심했습니다. 나중에는 조선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행적 때문에 일제에 의해서 친한파 선교사로 주목을 받다가 일제에 의해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조선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강제 출국 조치를 당했지만 해외에서 조선의 유학생들을 도와주면서 조선독립을 위해서 조선인들과 마음을 같이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순회강연과 신문 기고 등을 통해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였고, 추방당한 후에도 3·1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미국상원에 진술서를 제출하여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면서 대한독립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는 비록 조선인은 아니지만 그의 심장에는 이미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해방이 되고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헐버트는 1949년 8월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그리워하던 사랑하는 조선 땅을 다시 밟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말하던 그의 소원대로 그는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묻혔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전권을 일본에게 넘겨주며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며 헐버트 선교사가 「 The passing of korea 」 책의 서두에 쓴 헌사입니다.
비방이 극에 이르고
정의가 차츰 사라지는 때에
나의 지극한 존경의 표시와
변함없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 황제 폐하께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차 이 민족의 정기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이라는 죽음의 가상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 국민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당면한 우울한 현실 앞에서, 정의는 사라져 가고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만이 난무하는 열강들 틈바구니에서 희망조차 기대할 수 없었고, 지칠 대로 만신창이가 된 작은 나라를 보며 희망을 노래하던 그는 선교사이기보다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예레미야나 에스겔과 같이 그를 사용하셨는지 모릅니다. 피한방울 섞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그것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작은 나라가 멸망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끝까지 희망을 노래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우리에게 비록 지금은 눈앞에서 나라가 멸망해가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님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몇몇의 제국주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계획대로 식민지를 나누고 쪼개어 가져가면서 그들이 최고의 경영자인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지내왔음을 봅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세상의 모든 나라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잘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한 나라의 역사가 단지 그 나라의 대통령이나 혹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고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의 역사는, 모든 나라의 주권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수많은 외침과 위기 속에서도 이렇게 지내온 것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수고가 있었지만, 그 모든 공로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에 의해 역사가 뒤 바뀌는 것 같지만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부딪힌 현실은 마치 과거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 뒤에는 보이지 않는 큰 손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손입니다.
남 유다는 BC 586년경에 바벨론의 침입으로 멸망을 하게 됩니다. 결코 멸망이란 없을 것이라 여겼던 나라가, 하나님이 지켜주시리라 생각했던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던 상징이었던 성전도 무너져 버렸습니다. 백성들은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먹을 것을 얻지 못해 기절합니다.
예레미야는 이 처참한 상황을 슬픈 노래로 구슬프게 표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 어떤 악한 부모들은 너무 배가 고파 자기가 낳은 아이를 먹는 일까지 벌이기도하며, 어린 아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면서 입에 담았던 마지막 소리가 배고프다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도 고통스러운데,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오기까지 했습니다. 멸망한 나라와 무너진 성전을 바라보며 예레미야와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도와줄만한 나라도, 권력도 없었습니다. 그저 통곡하며 눈물 흘리는 것뿐입니다.
바벨론 병사들은 이런 백성들을 조롱합니다. “너희가 그렇게 믿고 따르던 하나님이 계신다던 그 성읍이 망하였는데 어디한번 이곳에서 그 하나님을 찬양해 봐라...”
누가 보기에도 이스라엘의 멸망은 재앙입니다. 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셨던 하나님의 능력도 사라진듯 보입니다. 이들은 분명 신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이들을 향해 희망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예레미야 29:1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예레미야 29:11)
이 말은 남 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것을 예언하면서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도, 포로로 끌려가는 것도, 그리고 마침내 회복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아래서 일어난 일임을 이야기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반역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기에 이들은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게 되고 장차 멸망당하게 될 것을 하나님은 계획하십니다. 그러나 그 재앙이 끝이 아니라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평안과 회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나라를 일으키시기도 하시며 한 나라를 멸망케도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주권아래 놓여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멸망해가고 있는 나라를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그 일을 친히 이루어 가십니다. 이사야서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사야 14:26-27)
앗수르와 남유다와 애굽을 비롯해서 고대 근동을 모두 장악하던 바벨론이 점점 내리막길을 향합니다. 스스로 교만하고 스스로를 심판자로 여겼던 바벨론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70년이 다 차자 바벨론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던 다니엘의 이야기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바벨론의 왕 벨사살이 귀족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선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성전에서 탈취하였던 금, 은그릇을 가져오라 합니다. 그리고 그 술을 마시면서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합니다. 그러던 중 한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자를 쓰기 시작합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 뜻은 하나님이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끝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왕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하여서 그 시대를 끝내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곧 그날 밤에 벨사살왕은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시대의 패권은 페르시아로 넘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의 백성들을 조롱하였던 시대의 경영자가 고작 70여년 만에 망하고야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인간들의 온갖 욕심과 무관심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자연도 신음하고 있습니다. 환경이 파괴됩니다. 각 나라의 정치적인 상황도 마찬가지며 부의 쏠림현상은 가속화 되어갑니다. 한쪽에서는 먹을 것 걱정 없이 살아가지만 한쪽에서는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온통 사방을 둘러봐도 희망을 얻기란 쉽지 않습니다. 몇몇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퇴행을 막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계는 종국에 이르러서는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대로 회복시켜나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손에는 두 손이 있다고 하지요. 하나는 ‘하나님의 오른손’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왼손’입니다. 오른손은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시고 다스리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의 손이십니다. 하나님은 필요하시면 그렇게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시대 속에서는 하나님의 왼손으로 일하시는데, 하나님의 왼손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손입니다.
세우신 주권자와 세우신 사람들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열망하는 사람들을 통해 그들이 속한 자리에서 성실과, 정의와, 정직으로 하나님의 일을 대리하는 것입니다. 직장인이든 사업가든, 법조인이든 언론인이든, 학생이든 교사든 모든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때론 우리 시각으로 볼 때 그 사람들의 영향력은 미미하여 악이 더욱더 득세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가실 것이며, 종국에는 하나님이 판결하시고 다스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신 세상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 안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외부에서부터 시작되는 구원의 힘이 필요합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스스로 헤엄쳐 살아봐’라고 말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듯이, 더 이상 자신에게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을 때가 우리에게도 찾아옵니다.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때, 내 능력보다 큰 문제를 만나고, 더 이상 나에게는 아무 소망도 없을 때, 건강을 잃어버리고 죽음을 직면하여 두려워하는 때, 바로 그때 우리의 밖에서부터 우리를 건지시는 힘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이고,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본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 겸손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의지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외부에서 오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과 소망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희망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을 때,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소망이 되시고 그의 삶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이 사실을 알고 인정할 때 우리의 삶에는 평안이 시작됩니다. 우리 삶이 요동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 불안하고 흔들리고, 나에게는 능력이 없을 때, 그때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하신 대로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힘들 때, 우리의 사업체가 힘들 때, 그리고 나라가 어려울 때도... 그 때도 하나님께 내어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것이니 주의 뜻대로 사용하여주소서. 그렇게 주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희망은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좋은 기도를 가르쳐 주셨죠? 바로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 두려울 때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나의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 이루어져야 할 것은 우리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과 우리의 인생을 경영하시는 최고의 경영자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
번호 | 제목 | 작성자 | 등록일 | 조회수 | 첨부 파일 |
---|---|---|---|---|---|
91 | 인생을 바꾸는 말의 힘 (야고보서 3:1-12) | 관리자 | 2025-03-09 | 6 | |
90 | 기도를 부탁하세요 (사도행전 12:1-12) | 관리자 | 2025-03-09 | 7 | |
89 |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새해 (야고보서 4:13-17) | 관리자 | 2025-01-03 | 64 | |
88 | 사랑하면 해결됩니다. (요한일서 4:7-12) | 관리자 | 2024-12-01 | 47 | |
87 | 결정하기 전에 기도하십시오 (열왕기하 6:14-19) | 관리자 | 2024-11-03 | 57 | |
86 | 감사를 온전히 이루라 (레위기 7:15-18) | 관리자 | 2024-10-08 | 58 | |
85 | 하나님이 높이시는 인생 (마태복음 23:1-12) | 관리자 | 2024-09-19 | 65 | |
84 | 고난의 때에 구해야 할 지혜 (야고보서 1:1-8) | 관리자 | 2024-09-19 | 53 | |
83 | ‘하나님의 도우심의 시작’(마가복음 1:29-35) | 관리자 | 2024-09-19 | 54 | |
82 | 염려하지 말라 (누가복음 12:22-28) | 관리자 | 2024-06-07 | 89 | |
81 |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에베소서 6:1-3) | 관리자 | 2024-06-07 | 75 | |
80 | 좋은 사람을 만나는 축복 (창세기 24:1-9) | 관리자 | 2024-04-10 | 104 | |
79 |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시편 137:1-9) | 관리자 | 2024-03-06 | 93 | |
78 | “현재를 살아가며 놓치지 말아야 할 것...” (마태복음 24:36-44) | 관리자 | 2024-03-06 | 97 | |
77 | ‘새해를 살아갈 때 필요한 것들...’ (창세기 23:1-13) | 관리자 | 2024-01-05 | 1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