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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바보 (마태복음 11:28-30)
    2023-11-10 15:49:23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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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바보

     

    마태복음 11:28-30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대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오라 하십니다. 우리는 저마다 삶의 무게와 고민과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하나가 찾아오고, 이러한 삶의 무거운 짐들은 끊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를 초대하시는 예수님께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큰 힘이 되며 위로가 되어주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위로하시는 이 말씀의 수혜자들은 욕심과 탐욕으로 인하여 버거운 짐을 짐을 지게 된 사람들이 아니라, 선한 삶을 살기위해 바보처럼 순종하다가 무거운 짐을 짊어진 사람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즉 예수님의 초청에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만이 응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이 세대의 사람들입니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삶의 형편도, 사회적 지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타공인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었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사실 이들은 율법의 본질은 깨닫지 못하고 외형만 중요시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든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포도주를 먹고 즐기는 경우 죄인 취급을 합니다. 또한 세례요한처럼 너무나 고독해도 이들에게는 귀신들린 사람일 뿐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 율법의 본질은 이해하지 못하고, 못하고 오로지 문자적으로만 판단했습니다.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셨습니다.

     

    우리도 자칫 이와 같은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삶은 우리들의 삶과 멀리 떨어진 삶이 아닙니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어느덧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특별히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더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신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자기가 만나 하나님을 너무 절대화합니다.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전부인양, 은혜받는 유일한 길인 양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했더니, 이렇게 되었더라 그러니 너도 이렇게 해야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분명 그에게 은혜와 복을 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은혜의 작용을 그대로 남에게 똑같이 적용하고, 남을 판단하고, 가르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들은 너무나 빨리 정답을 내놓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자신이 겪었던 일로 고민하거나 힘들어 하면 주저 없이 답을 내놓습니다. “네가 기도하지 않아서 그래, 또는 네가 믿음이 없어서 그래, 그게 다 하나님의 뜻이야!” 상대방의 아픔을 너무 쉽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수학 공식처럼 짜여진 것이 아닙니다. 내 삶에 이렇게 작용했다고 해서 이웃의 삶에 동일하게 작용하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각자의 환경과 형편,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다양하게 우리들의 삶 속에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렇게 하셨지만 이웃에게는 저렇게 하실 수도 있고, 신앙의 최선과 열심을 다해도 아직 때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속에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만약 우리가 수학공식처럼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 정답을 안다면 그 하나님은 더 이상 성경에 기록된 그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머리로 이해가 되고 우리 머리로 짐작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더 이상 그분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머릿속에 훤히 하나님의 수가 다 보인다면 그런 분이 어디 하나님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과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상식과 방법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반면 이런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반해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에 대해서 갈망은 하지만 삶이 버겁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문제를 인생의 문제를 해결한 방법이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라는 말을 원문으로 보면 수동의 뜻이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 누군가에 의해 무거운 짐이 지워진 자들을 가리킵니다. 즉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 의하여 율법의 기준으로 평가받고 정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율법은 너무도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만 하나님나라에 갈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라는 높은 문턱으로 이들은 하나님나라를 꿈꿔보지도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세리와 창녀들이었고,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생활고와 삶의 형편상 도저히 율법을 지켜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몸을 팔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고, 안식일에도 생계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봐도 하나님앞에서 죄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나 같은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전하는 신앙의 기준은너무 높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르쳐준 하나님의 나라는 달랐습니다. 금식을하지 않아도,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정해진 절기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해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천국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곳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천국은 이들에게도 열려있었습니다. 바로 눈앞에 죄인인 자신들과 함께 먹고 뒹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진게 많지 않아도, 율법을 지킬 수 없어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예수님전해주신 복음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정말로 기쁜소식이었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복된소리’, ‘기쁜소식입니다.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다.’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이들은 율법으로는 완성될 수 없는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였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구원의 근거가 자신의 행위와 삶에 있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순수하게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항상 틀린 사람들이고, 방법이 잘못된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 입장에서는 옳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의 밭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으로 남을 판단하고, 마치 자기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정답을 내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는 틀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옳으시다. 우리는 부족해도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이렇게 자신은 부정하고 하나님만 긍정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해 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옳다 하시며, 그런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두 번째로 삼아야 할 반면교사는 20절 이하에 해당되는 고라신과 뱃새다 도시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도시에서 많은 권능을 행하시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권능을 가지고 행하셨다함은 수많은 기적들을 말합니다. 즉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무엇보다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고,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도시의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수없이 많은 이적과 기사들이 펼쳐져도 그들은 그 사실을 그냥 단순히 즐기거나 신기해할 뿐이고 그런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에게는 별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이러한 예수님의 탄식과 질책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예수라는 존재가 어떠한 현실적인 이익을 가져다줄지만을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질책과 책망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많은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사람들의 관심과 기도를 들어보면 거의 동일한 주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내 삶에 어떠한 이익을 가져다주실 수 있지?”온통 관심과 기도가 이 주제입니다. 회개가 사라진 지도 오래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내 삶의 문제의 해결책을 찾았다는 것과 동일한 말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참된 기쁨과 생명보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들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순종도 그러한 것들이 계산되어야 순종합니다. 순종하기 전 먼저 판단하고, 어디까지 순종할지, 어디까지 해야 손해이고 이익인지 따지며 적당히 믿습니다. 이런 자들이 이 세상을 슬기롭게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명령에 대해서 짊어질 수고와 무거운 짐도 없습니다. 너무 무거울 것 같은 명령은 이미 판단하고 적당히 타협해서 버렸기 때문에 짊어지는 짐도 무겁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하시는 이 초청의 다른 이면의 말씀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오라는 말씀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짊어져야할 무거운 짐이 없다면, 수고가 없다면 누군가 도와줄 사람을 찾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우리가 순종할 때는 경험과 지식으로 판단해서 순종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순종을 먼저 한 다음,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명령을 하면 먼저 우리의 경험과 선례들을 들어서 꼼꼼히 따져보고 행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우리의 판단과 경험보다 순종하는 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고, 하나님의 길과 생각은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순종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에게 단 일원도 주시지 않습니다. 사람을 붙여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같으면 아무도 순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방주를 지을만한 돈과 재료들이 눈앞에 보여야 순종할 것입니다. 그 방주를 지을 인력들이 보여야 그제야 마지못해 순종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일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돈이 있든 없든, 재료가 있든 없든, 사람들이 평가하든 말든 방주를 만듭니다.

     

    노아가 보여준 순종은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결코 그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신 후 120년이 지나서야 홍수를 보내십니다. 즉 노아는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그 명령이 이루어지기까지 적어도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순종했던 것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120년이라는 시간입니다. 얼마나 많은 회의와 의심이 들었겠습니까? 중간에 몇 백번이라도 포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홍수가 나타나기 전, 119년 동안에는 사람들의 눈에 노아는 바보로 보였을 것입니다. 노아는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중간중간에 하나님이 증거라도 주시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으니 힘이 듭니다. 순종은 그 결과를 기다리기까지 힘든 침묵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반드시 그 일이 이뤄지고 만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119년 동안 순종했습니다. 119년을 순종했다는 것은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20년째가 되던 해 노아가 바보가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가 옳다고 손을 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순종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 눈에는 매순간 바보같고, 답답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해주시는 그 한때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이미 이루시겠다고 하는 수많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의 말씀들은 도대체가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모든 신앙행위의 마침표입니다. 구슬이 서말이 있다한들 꿰메고 매듭을 져야 목걸이를 하든 팔찌를 하든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알고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어도 순종하지 않는 것은 매듭을 짓지 않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순종은 바로 우리의 믿음을 매듭을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바보처럼 묵묵히 순종하며 살아가십시오. 때로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지라도 남들에게 어리석다 평가를 받을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이 한마디 말씀의지하며, 하나님 옳다인정해 주실 그때까지 하나님만 바라보는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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