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평화의초대
  제  목 : 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 (창세기 21:1-7) 조회수 : 138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6-10-18

    ‘보는 것만 믿으세요.’ 어느 회사의 신문, TV 광고에 쓰는 브랜드 멘트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우리 눈에 보이는 그것이 사실인 것은 아니다.’ 라는 이와 정반대의 말을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단지 우리의 감각에 따라 느낀 것일 뿐 실제와 다른 것이라는 말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바른 지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나름대로 판단하고 고려해서 행동한 것일지라도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믿음을 근거로 행동한다고 합니다. 크든 작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다 믿음의 한 부분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 드디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맨 처음 약속하신 때로부터 무려 25년의 세월이 지났으므로 참으로 오랜 세월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별명이 믿음의 아버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의심도 했고 흔들리기도 했고 반발도 했습니다. 속도 좀 상했습니다. 하나님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창15:3) 라고 대들기도 했습니다. ‘안 주셔도 됩니다. 우리 집에 있는 종을 내 상속자로 삼겠습니다.’ 라고 대들다 하갈이라는 첩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그때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속이 많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실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본처를 통해서 너에게 후손을 퍼뜨려나가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내 사라가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것 같지 않으니 귀엽고 예쁜 여종 하갈과 잠자리를 같이 해서 아이를 낳도록 하라고 하자 아브라함은 좋아라 하면서 아기를 낳은 큰 실수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심하게는 하나님을 비웃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네 처를 통해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씨익’ 웃었습니다. 좋은 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이었습니다. 사라도 마찬가지로 자기 나이가 많고 한참 전에 경수가 끊어졌다고 말하면서 웃었습니다. 오늘 6절 나를 웃게 했다고 말하는 이 웃음과는 전혀 다른 웃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도, 사라도 믿음이 많이 흔들렸습니다. 회의도 있었고 의심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볼 때 왜 저러나 할 때가 있습니다만 우리 자신도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의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회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그런 일들은 오히려 필요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 혹 흔들리거나 회의가 들거나 때로는 의심될 때가 있을 때, 그것을 나쁜 것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죄의식을 가지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런 것이 있어야 믿음이 더 굳건해집니다. 우리나라 말에도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회의를 거치지 않은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의심할 수 있고 흔들릴 수 있고 회의할 수도 있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하겠는가?’ 입니다. 그럴 때가 있을 수 있지만 계속해서 흔들리고 계속해서 의심하고 계속해서 회의한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진로를 자주 바꿉니다. 전공을 바꾸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자기에게 맞는 전공으로 가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해서 그렇게 될 때입니다. 또 여자친구, 남자친구를 사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흔들려 계속해서 바꾸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흔들려도 된다, 회의가 있어도 된다, 의심이 있어도 되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고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어느 시점이 되면 끝나야합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그러한지 아니면 아무리 흔들렸고 회의했고 방황했다 하더라도 결론은 제대로 잡았는지 입니다. 흔히 머리가 잘 돌아가고 이것저것 생각이 많고 계산이 많은 사람은 많이 요동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똑똑한 사람은 방황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모든 것을 중지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신학교 교수님들 가운데는 보수적인 교수님들도 계시고 진보적인 교수님들도 계십니다. 옛날에 아주 유명한 신학자 가운데 상당히 진보적인 교수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학교에서 강의하실 때는 상당히 진보적이었고 때로는 급진적인 강의를 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이 교수님은 교회 담임목사님의 역할도 같이 담당하셨습니다. 제자 중 한 명이 그 교수님의 교회에 예배드리러 가서 설교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평소 학교 강단에서 가르치는 말씀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강단에서는 진보주의적 때로는 급진주의적인 말씀을 하셨는데 설교는 전혀 다르게 아주 보수적인 설교였던 것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난 뒤 제자는 그 교수님께 학교에서 하는 강의와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그 교수님은 아주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보게, 학교에서야 이런 말도 저런 말도 해보는 것이지...” 교회에서는 그렇게 이런 말 저런 말 해보는 곳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이의심도 했습니다. 반발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비웃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분명하게 아브라함의 결론은 믿음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고 난 후에 너무도 좋아했습니다. 본문 7절에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라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좋아할만합니다. 그런데 7절 말씀을 곰곰이 보십시오. 좋아하는 가운데 다른 것이 있습니다.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이라고 말했는데 누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사라 밖에 더 있습니까? 자기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웃었던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전적으로 믿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라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믿고 난 후 드디어 믿음대로 되었다고 말했다면 얼마나 멋졌을 것이며 자식들에게나 또 다른 사람들에게 할 이야기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때 제대로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의심도 했고 하나님을 비웃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웃었다고 이야기하시자 그때는 두려움에 자기는 웃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을 비웃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사라에게 또 아브라함에게 있었습니다.


또 그렇게 믿음이 좋았던 욥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욥이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 많던 재산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갔고 열 명이나 되는 자식을 다 잃었습니다. 거기다 몸도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욥은 잘 견디었습니다. ‘내가 빈손으로 왔으므로 빈손으로 가야지.’ 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께서 가져가시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견디었습니다. 믿음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친구들이 욥을 찾아 왔습니다. 같이 울면서 지낼 때는 참 좋았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친구들은 욥에게 자꾸 이런 저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고통당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될 수 있으면 말하지 마십시오. 도와준다고 하는 말이겠지만 사실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상처만 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욥도 그냥 울고만 있을 때는 도움이 되고 참을 수 있었지만 친구들이 말하기 시작하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제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되었습니까? 제가 그런 일을 당해야 되는 까닭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면 마땅하게 당하겠습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한 번 해보십시오. 무슨 말씀이든지 하시기만하면 ’아멘‘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라고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너무도 속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욥을 야단치셨습니다. “네가 뭘 그리 잘했다고 큰소리치느냐? 지금까지 네가 한 일 중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느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할 것인지 네가 아느냐? 내 마음 속을 볼 수나 있느냐? 세상 돌아가는 일을 네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있느냐? 왜 그렇게 말이 많으냐?” 이 말씀을 들은 욥은 하나님 앞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2-6)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욥도 많이 흔들렸습니다.


아이를 얻고 그렇게 좋아하던 사라도 처음에는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귀한 것은 사라는 결국 믿음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1절은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고 진실하시므로 한 번 말씀하시면 당신이 하신 말씀을 지키시는 분인 줄 알았고 그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약할 수 있고 시원찮을 수 있습니다. 많이 부족합니다. 곁눈질 하고 여기저기서 흔들리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어디로 가는가?’ 입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 제자들이 모인 곳에 오셨습니다. 그 자리에 열 두 제자 중 도마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가신 후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8일 뒤에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도마도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도마가 얼마나 죄송하고 부끄러웠겠습니까? 그때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 고백은 기독교 최고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사람은 도마가 최초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대단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20: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믿는 것, 보고 난 후에 믿을만한 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칭찬할만하고 자랑할 만하고 내세울만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믿고 난 그때야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오해하고 저 사람은 아니라고 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는다고 하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들 모두 나는 안 믿는다, 못 믿는다 할 때, ‘그래도 나는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보지 않아도 믿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그냥 믿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신실하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한 번 말씀하시면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십니다. 잠시 잠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변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믿지 못하고 기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조금 기다리다 가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하시고 계시는데 다 떠나가 버립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것을 걱정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눅18:7-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난 후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라고 한탄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속에는 믿음이 있는 사람, 믿는 사람을 보는 소원이 있습니다.


믿음의 성경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11:6)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여러분이 믿으면 하나님이 참 행복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게 되면 여러분도 결과적으로 기뻐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여러분의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된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없는 까닭, 행복이 없는 까닭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인생 살면서 이런 저런 문제가 해결된 적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행복하셨습니까? 소원이 이루어져서 그것 때문에 좋았습니까? 정말로 기뻤습니까? 잠시는 그럴 수 있었겠지만 진실로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혹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행복할 수 있고 계속해서 기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기쁨이 없습니다. 참된 인생의 의미가 없습니다. 인생의 가치를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바보같이 보여도 다른 사람이 나를 못난 사람, 미련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 말씀을 믿으십시오. 차라리 바보처럼 믿으십시오. 속은 것 같아도 믿으십시오. 또 속을 것 같아도 믿어보십시오. 차라리 속겠다고 작정하고 믿으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시원하게 웃어보십시오. 멋지게 웃어보십시오. 억지로라도 웃어보십시오. 상황 때문이 아니라 그 사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웃으십시오. 하나님이 계십니다. 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 아버지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신 그 하나님을 보고 웃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웃는 것입니다.


요즘 웃음치료를 많이 합니다. 웃음치료가 우리나라에 암병동에도 많이 도입되고 있고 외국에서는 웃음으로 이미 암이 많이 낫고 암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활짝 웃으면 하나님께서 진짜로 활짝 웃게 만들어주십니다. 하나님께 속을 일이 없습니다. 절대로 속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1절 맨 처음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라고 말씀하십니다. 1절에서 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라고 말씀하십니다. 2절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한 번 말씀하시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은 믿기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지 25년이나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속은 것 같았을 것이고 객관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보아도 더 이상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사상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후회하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어서 후회한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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