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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누가복음 5:36-39) 조회수 : 106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6-10-18

저명한 심리학자인 A.H. 마즈로 박사가 인간의 욕구에 대해서 욕구단계설이라고 하는 아주 설득력 있는 이론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마즈로 박사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 번째는 생리욕구, 두 번째는 안전욕구입니다. 세 번째는 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구, 네 번째는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 다섯 번째는 자기실현의 욕구입니다. 이 다섯 가지 욕구는 레벨이 같은 것이 아니라 계단을 오르듯이 한 계단 한 계단 위로 올라갑니다.
첫 번째 욕구인 생리욕구는 가장 낮은 단계라고 표현합니다. 식욕, 성욕 그리고 잠을 자고 싶은 마음인 수면욕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가장 기본적인 이 첫 번째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채워지게 되면 다음 단계로 나가는데 그 다음 단계가 안전에 대한 욕구입니다. 개인의 안전, 가정의 안전, 건강을 바라는 것, 조금 더 나가게 되면 경제의 안전, 나라의 안전, 이런 것들을 바라는 마음이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안전의 욕구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구입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합니다. 소속감에 대한 욕구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또 사랑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이것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부모는 또 자식의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이 다 있습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충족되면 네 번째인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등장하게 됩니다. 자존심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지만 이것만은 못 참겠다고 하는 것, 무시당하는 것은 못 참겠다고 합니다.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또 남보다 내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우월감의 욕구가 있고, 적어도 내가 하는 일은 그 누구보다도 못하지 않다, 내가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 정도 네 가지 욕구만 채워진다고 해도 상당한 수준인데, 인간이란 존재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반드시 그 다음 단계 즉 다섯 번째인 자기실현 욕구를 향하여 나가게 되어있다고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이 다섯 번째 단계의 욕구까지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말합니다. 보통 세 번째인 소속감과 사랑받는 욕구만 충족되면 만족합니다. 한 단계 더 나가는 사람도 어느 정도 있지만 네 번째인 인정받고 싶은 욕구만 채워지면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멈추고 더 이상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자기실현의 욕구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다른 어떤 다른 형태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다섯 번째 욕구인 자기실현의 욕구까지 달성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도전할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실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지 못하여 패가망신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느 정도 인정받고 존경받고 사랑받았지만 더 사랑받고 더 인정받고 더 존경받으려고 하다 보니 잘못되어 어렵게 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 감방에 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실현 이란 것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다방면으로 연구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종합해보면 인간이란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할 때 자기실현의 욕구가 성취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지고의 목표, 지선의 목표를 향해서 매진해나가는 것, 힘써서 달려갈 때 인간은 자기실현의 욕구가 어느 충족되고 만족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실현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루려고 모든 노력을 다할 때 참된 인생의 의미가 있고 행복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들은 각자 다 달리 하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우리 기독교에서는 소명이라고 말하고 다른 말로 미션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받은 소명, 자기가 이루어야할 그것을 할 때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할 때 그리고 내가 할 일을 알 때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자기실현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두고 인간 최고의 욕구는 인간 자신의 욕구가 아니라 신의 요구라고 표현합니다. 신의 요구를 충족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할 때 즉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려고 모든 애를 다 쓸 때 사람들은 자기실현을 어느 정도 할 수 있고 여기에 참된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포도주를 병에 보관하지 못하고 가죽부대에 보관하였습니다. 가죽부대란 양이나 염소의 가죽을 사용하는 것으로 속 내용물을 다 뺀 후 기워 주머니를 만든 것으로 포도주를 보관하였습니다. 포도주에는 가스가 나옵니다. 포도주를 제대로 담그려면 포도에 술이나 설탕을 넣고 밀봉한 후 거기다 호수를 집어넣고 물속에 집어넣습니다. 포도주에서 나오는 가스를 빼내기 위해서입니다. 물속에는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포도주가 산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런 것이 없었으므로 가죽부대에 넣다보니 포도주에서 가스가 나와 가죽부대를 산화시켜 딱딱하게 만들고 가죽부대는 금이 가게 됩니다. 그러다 어느 때가 되면 갈라진 틈이 더 벌어져서 포도주가 새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향하여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으면 쏟아지기 때문에 포도주도 못쓰게 되고, 가죽부대도 터져서 못쓰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땅히 넣어야할 곳에 넣고, 들어가야 할 곳에 들어가고, 가져야할 모습을 가질 때 나도 건강하고 사회도, 세상도, 나라도 건강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안 될 때는 나도 버리게 되고 사회도, 세상도 버리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강하게 비유하신 것이 본문 36절의 말씀입니다. 36절에서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 가운데 이런 인생들이 많다는 말씀입니다. 마땅하게 새 옷 노릇을 해야 할 사람이지만 그 노릇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찢어서 낡은 부대를 기우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셨습니다. 또 공부를 잘하도록 좋은 머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올바른 곳에 머리를 쓰지 아니하고, 써야할 곳에 돈을 쓰지 아니하고, 재주를 써야할 곳에 쓰지 아니하므로 세상도 버리고 자기 자신도 패가망신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둘 다 못쓰게 됩니다. 포도주도 버리고 가죽부대도 버리게 되고 새 옷도 버리게 되고 헌옷도 다 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너무도 희한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본문 마지막 말씀 39절에서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함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바꾸기 싫어합니다. 삶의 방식을 바꾸기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그저 하던 대로 살겠다고 합니다. 고민하기를 싫어하고 고뇌하지 않습니다.
묵은 포도주는 별 맛이 없습니다. 요즘은 보관 장치가 잘 되어 오래된 포도주가 명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옛날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질이 떨어져 맛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늘 마시던 것이라 그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새것을 마시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무언가 잘못될 것 같고, 손해 볼 것 같고, 힘들고 귀찮기 때문입니다.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것이 편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교만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오던 방식, 내가 생각하던 방식이 옳다는 교만입니다. 그래서 버리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를 두려워한다는 표현이 적합할 수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 바로 이렇습니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돈이 많습니다. 교회가 많습니다. 교회마다 건물이 참 좋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대단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러나 곧 한국 교회 그리고 한국 기독교는 망합니다. 이미 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목사가 되려면 죽을 작정을 해야 합니다. 장가 갈 곳이 없어, 시집 올 사람이 없어서 장가도 못가는 목사, 이 정도가 되어야 기독교가 삽니다. 그러나 현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망합니다.
주님께서 포도주도 못쓰고 가죽 부대도 못쓰고 새 옷도 못쓰고 헌옷도 못쓰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회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나라까지, 이 세상까지 못쓰게 하는 일이 생겨난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독교가 세상의 옷을 벗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세상의 철학을 버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기독교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그 길을 걷지 아니하고 세상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더 인정받으려고 하고 더 존경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왜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받아야합니까? 결과적으로 존경받는 것이야 좋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으려고 애쓰면 안 됩니다.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또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독교 길을 마땅하게 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그 덤으로 세상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이지 세상의 존경을 받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목적인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길은 따로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가야할 길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을 붙들어야합니다. 그 철학을 붙들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 기독교가, 기독교 교회가, 기독교 신자들이 그 길을 가지 아니하고 그 철학을 붙들지 아니하면 다 망합니다. 세상도 망하고 교회도 망하고 기독교 신자들도 다 망합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아주 비참합니다. 세상의 길을 가면 그렇습니다. 세상의 철학을 붙들면 반드시 이렇게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제 기독교가 기독교 교회가 기독교 신자들이 가야할 길이 무엇입니까? 붙들어야할 철학이 무엇입니까? 너무도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이래 2,000년 동안 진리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지구가 완전히 멸망할 그때까지 이것은 진리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제대로 붙들어야합니다. 이리저리 머리 굴리고 재주 부려서 왜곡시키거나 변형시키지 말고 순진하게 그 말씀을 붙들어야 됩니다. 그 길을 걸어야지 세상도 살리고 우리 기독교도 살고 기독교 신자들도 살 수 있습니다.

기독교, 기독교 교회가 가야할 길의 가장 대표적이고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것 몇 가지를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최고의 율법과 계명은 무엇인지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거침없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사랑하는 것입니까? 사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쉽게 생각하면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 자기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예배당에 올 때에도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당에 들어왔는지가 중요합니다. 찬송하는 것도 그렇고 헌금도 그렇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는가 적게 하는가는 관계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헌금을 바쳤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람을 생각하는 것도 한 사람 한 사람 귀하게 여기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들 그 중에서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으로 가장 기독교적인 가르침입니다. 기독교 최고의 정신을 담고 있는 산상수훈은 마태복음5장, 6장, 7장의 말씀입니다. 그 중 핵심은 5장 맨 처음의 여덟 가지 복입니다. 이 여덟 가지 복은 또 하나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인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즉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이 무엇입니까? 욕심이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욕심을 버려야합니다. 모든 종류의 욕심을 버려야합니다. 소위 거룩한 욕심도 버려야합니다. 교회를 부흥시켜야한다는 마음도 버려야합니다. 부흥은 하나님이 시켜주십니다.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합니다. 나라에 대해서도 고맙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고맙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누구에게나 고맙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또 겸손한 마음입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가진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라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기독교가 기독교 교회가 가야할 두 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것, 마음이 가난한 것입니다. 만족하고 욕심이 없는 삶을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욕심이 없는 삶, 만족하는 삶, 겸손한 마음입니다.

또 하나 더 예수님께서 여러 번 강조하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6-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섬기는 자가 되는 것, 종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과 많이 다릅니다. 세상은 어떻게 하든 섬김 받으려고 하고 종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기독교, 기독교 신자들, 교회가 가야할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마20:25-26) 길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갈 길, 기독교 신자들이 갈 길, 세상 사람들이 붙들어야할 철학, 기독교 신자들이 붙들어야 할 철학이 다릅니다.

또 하나 더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덟 가지 복을 주셨는데 그 외에 복을 하나 더 주셨습니다. 사도행전20장 35절에서 주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 교회가, 기독교 신자들이 붙들어야할 철학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어야합니다. 자꾸 주어야합니다. 여러분이 주어야합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너무 다릅니다. 이들은 더 받기 원하고, 섬김 받기 원하고, 더 가지기 원하고, 내가 귀하게 여김을 받기 원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 길을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길을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셨고 여기에 들어가는 문을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길이야말로 우리 예수님께서 가신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마땅하게 들어가야 할 문, 가야할 길입니다. 들어갈 때는 참 좁고 험하지만 놀랍게도 거기에 우리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시고 참된 만족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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