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평화의초대
  제  목 :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누가복음 17:11-19) 조회수 : 260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6-06-17

     연세 드신 분들은 ‘내쇼날(National)’ 이라는 상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옛날에는 ‘내쇼날’ 제품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제법 괜찮게 사는 집이었습니다. 이 전자제품회사의 창업자는 마스시다였습니다. ‘내쇼날’은 창업자 마스시다 회장이 94세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산하에 570개의 기업이 있었고 종업원이 약13만 명이었습니다. 마스시다 회장은 그 누구보다도 어렵고 힘들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었고 자전거 점포의 점원으로 일하였으며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해서 밤마다 어머니가 그리워 눈물을 흘리던 울보였다고 합니다.


일본 굴지의 회사인 이 회사의 기업총수에게 한 직원이 “회장님, 그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이처럼 큰일을 이루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은 세 가지 하늘의 큰 은혜를 입었는데 하나는 가난이라는 은혜를 입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어서 두 번째는 허약한 것이고, 세 번째는 못 배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직원은 깜짝 놀라 “회장님은 어떻게 세상의 불행한 조건들을 다 하늘의 은혜라고 말씀하십니까?” 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 말에 마스시다 회장은 “나는 가난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서는 잘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네. 또 약하게 태어난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도 일찍이 깨달았고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썼다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 중퇴이므로 나는 내가 배운 것이 모자라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스승으로 받아들여 배우는데 노력했다네.” 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러한 불행한 환경은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하늘이 준 시련이라 생각하고 늘 감사하고 있다네.”


이것은,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감사의 조건이 되고 그리고 기어코 그 사람은 감사할 상황을 만들고야만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시는 길에 어느 마을을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저 멀리서 예수님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우리를 좀 고쳐주십시오.” 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보통은 대여섯 명 정도 모이는데 열 명이 모였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이처럼 모여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인들과는 상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율법으로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전염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못했고 이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과 가까이 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사람들과 가까이 하지 못하고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금년에 우리 교회가 할 일 중 큰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라오스에 있는 나환자 마을에 학교를 짓는 것입니다 당회에서 결의를 하고 지금 준비하고 있으므로 준비가 되는대로 거기에 학교를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캄보디아 스텅트랭에 나환자들이 살 집을 짓는 것입니다. 지금 스텅트랭에 계시는 동역 선교사님의 집에는 나환자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열 명 정도가 함께 살고, 많을 때는 30-40명 정도 함께 사는데 지금은 가족들과 떨어져 나환자들만 살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는 갈 데가 없기 때문에 선교사님이 그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들의 큰 고통은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잘못 안 것이 있었습니다. 나환자들은 가족들과 감히 살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나환자 가족들도 아무리 어머니, 아버지이지만 나병환자들과 함께 살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가족이란 이렇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혹시라도 내가 어머니, 아버지 때문에 나병에 걸린다고 할지라도 나는 어머니, 아버지와 살겠다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피해가 갈까 염려되어 대체로 꼭 함께 살겠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마음속으로는 할 수만 있으면 자식들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살 집이 없는 것입니다. 집만 있으면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가족들을 다 불러들여 같이 살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들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나환자들이 그 사람들에게 가서 살 수는 없고 가족들이 와야 하는데 있을 곳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살 집이 없어서 참으로 괴롭습니다. 나병환자들은 그들끼리 모여 살다가 1년에 한 번씩 휴가를 내어 세상 사람들 모르게 가족들을 찾아가서 만나고 돌아온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다 오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인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병환자들이 낫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절박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소리 질렀다고 하는데 사실 나병환자들은 병의 생리상 소리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큰소리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들의 호소를 들으시고 즉각적으로 치료하셨고 그들은 다 나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미 다 나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들은 나병환자가 아니라 일반인이지만 이들에게는 증명서가 있어야했으므로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증명서는 당시 제사장이 해주어야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확인이 있으면 그때부터 그들은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깨끗함을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 중 한 명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돌아와서 감사 인사를 하는 한 명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짧은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 몇 가지를 가르치십니다. 크게 두 가지만 보겠습니다. 하나는 나병이라는 무서운 병을 치료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그것이 진짜 복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진짜 복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병 치료보다 훨씬 더 대단한 것이고, 훨씬 더 감격할 일이고, 훨씬 더 놀라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병을 치료받았다는 것이 대단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진짜 복에 비하면 별 것이 아니고 아무 것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나병환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여러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진짜 복이 있는데 그것은 받지 못하고 앞에 있는 맛보기 복만 받고 다 받았다고 좋아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창고 안에는 조그마한 복인 맛보기 복은 많이 팔려 나갔지만 속에 있는 진짜 복 창고에는 물건이 잘 팔리지 않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감사인사를 하지 않고 돌아간 그 아홉 명은 참으로 딱합니다. 돌아온 한 명은 맛보기 복도 가지고 갔고 진짜 큰 복도 다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홉 명은 조그마한 복 하나밖에 받지 못하고 그것이 다 인양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와서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면 이 한 명의 나병환자처럼 진짜 복을 다 가지고 갈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할 까닭은 너무나 많은 경우에 바로 우리에게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작은 복을 받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큰 복을 받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문을 통해서 그 이유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오지 않은 그 아홉 명은 그렇게 소원하고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수가 있습니다. 이제 볼 일 다 보았는데 귀찮게 저 멀리 가서 예수님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아쉬울 것이 없는데 일부러 찾아가서 인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렇습니다.

또 혹 개중에는 고맙다고 인사하러 가야겠는데 빈손으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무엇을 들고 가야겠는데 아무리 보아도 들고 갈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무엇이 좀 생기면 들고 가서 인사해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변명이고 핑계이고 구실밖에 되지 않습니다. 정말로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떤 이유가 있어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무도 고맙고 감사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고 빨리 가서 인사하고 싶습니다. 진짜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홉 사람이 그저 작은 맛보기 복만 받고 진짜 복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 낫는 것까지의 복은 받았지만 더 큰 복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주님의 탄식소리가 성경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주님께서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돌아온 한 명의 답을 듣자고 물으셨겠습니까? 탄식입니다. 감사하는 사람들이 너무 적다는 탄식입니다. 열 명 중에 감사하는 사람이 기껏해야 한 사람 정도 있고 나머지 아홉은 감사하지 않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름대로 다 감사하는 마음이 조금씩은 있지만 10%정도만 정말로 감사하는 마음이 있고, 90%는 그런 마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탄식은, 희한하게도 감사해야할 이유가 있는 사람, 다른 사람보다도 더 감사해야할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감사하지 않더라는 말씀입니다. 돌아온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돌아와도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아홉은 그 한 명보다 감사할 이유가 훨씬 더 많았지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정확하게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세군은 해마다 자선냄비에 돈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보고합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나라 경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구세군 자선냄비의 돈이 더 많이 들어오고 나라 경제가 좋으면 돈이 적게 들어온다고 합니다. 매년 이렇게 반비례합니다. 왜 그럴까요? 좋을 때는 감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감사하지 않습니다. 감사할 이유가 많은 사람은 감사하지 않습니다. 잘 아십시오. 우리 하나님께서는 진짜 큰 복을, 좋은 것을 많이 주시기 원하는데 주시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면 그것을 받고 나서 감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그마한 것을 주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하는데 큰 것을 주면 인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탄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세 번째 탄식은 진짜 복을 받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창고에 수북하게 진짜 복이 쌓여있는데 왜 이것을 받아가지 못하는가?’ 라는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왜 나에게 그런 복을 안 주시는가, 왜 좋은 것은 안 주시는가 불평하고 불만을 가집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것까지 다 아십니다. 다 아시면서도 못 주십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진정한 복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는가?’ ‘그렇게 바보 같은 사람들이 어디 있는가?’ ‘그것만 받고 돌아가서 나중에 또 와서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왜 이렇게 하는가?’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감사하러 온 한 사람은 그 아홉 명에 비해서 감사할 조건이 적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혼자만 감사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확인하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감사는 감사할 이유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사할 이유가 많은 사람, 감사할 이유가 큰 사람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감사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감사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대단한 은혜를 받고 선물을 받아도 감사하지 않지만 반대로 감사할 마음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적게 받아도 경우에 따라서는 받은 것이 하나도 없어도 감사하더라고 하나님께서 정리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감사는 곧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감사하기 위해서 돌아온 한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의미는 무엇입니까? 돌아와서 감사한 그것이 곧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곧 믿음이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돌아온 이 사람에게 믿음이 있다는 말이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한 명이 돌아와서 감사한 그 감사는 감사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나머지 아홉 명은 감사하러 오지 않았다는 것 이전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나병이 나은 것이 예수님 덕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지금까지 나병을 위해서 열심히 먹어온 약이 드디어 효과를 발휘해서 나은 것이지 예수님과는 상관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치료해주신 것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감사의 의미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감사가 감사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감사는 그것이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가 없는 것은 나에게 해준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는 것은 부모님께서 나에게 해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무엇을 이루고 어떤 것을 가지게 된 것은 내가 열심히 했고 내가 잘 살아서 그런 것이지 부모님과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함이 없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준 것 때문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감사가 있다는 것은 받은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다 부모님 덕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어떻게 나를 공부시켜주셨습니까..’ ‘내가 이런 복 받는 사람이 되게 하신 것도 다 부모님 덕입니다. 고맙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온 한 명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신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식들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부모의 인정과 사랑입니다. 자식들이 아무리 나이가 들고 출가했다 하더라고 자식이 또 자식을 보았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면 자식들은 그것을 먹고 삽니다. 그것 때문에 행복하고 그것 때문에 더 건강해집니다. 부모님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모님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감사입니다. 하나님을 행복하게 하는 것도 감사입니다.


너무도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님께 또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부모님만 행복하게 하고 하나님만 행복하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곧 우리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중서부의 미네소타 주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미네소타 주에서는 1874년부터 77년까지 3년 동안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아 산천초목이 다 말라버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메뚜기 떼가 구름같이 덮여서 남아있는 모든 것을 다 갉아먹었습니다. 미네소타 주 전체가 절망에 빠졌을 그때에 미네소타 주지사 필스베리스는 1877년 4월 27일, 그 날을 미네소타 전주민의 감사 기도의 날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주민들은 전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주지사는, 농작물은 전멸했지만 우리 몸이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틀림없이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실 것인데 그때 가서 해야 할 감사를 미리 앞당겨서 하자는 의미에서 이 날을 감사 기도의 날로 정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미네소타 주 하늘 전체가 감사기도로 덮였다고 합니다. 정말로 믿기 어려운 사실은 그 당시 들판을 덮었던 메뚜기 떼가 며칠 사이에 전부 다 죽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이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했지만 그들의 모든 노력과 연구 조사의 결론은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기어코 감사의 상황을 만들고야맙니다. 조금 더 신앙적으로 말씀드린다면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기어코 감사하는 환경이 이루어지고야 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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