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평화의초대
  제  목 : 임마누엘 (요한복음 1:1-14) 조회수 : 214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6-03-25

기독교의 아주 중요한 진리 중 하나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진리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진리입니다.

이 말의 논리는, 우리 하나님은 기독교 신자들의 아버지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고 자녀들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가 자녀들과 함께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딸인 기독교 신자들과 늘 함께 하신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과연 그것이 사실인가? 어떻게 아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 한 가지에 따라서 좌우됩니다. 믿음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여기에 달렸지 이렇게 설명하고 저렇게 설명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으면 절대로 알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 말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스스로 착각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심리적인 문제일 뿐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자동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질문할 필요도 없는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늘 함께 하신다. 지금까지도 함께 하셨고 앞으로도 틀림없이 함께 하신다, 어떤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심지어는 내가 하나님 앞에 좀 밉상을 부리고 좀 잘못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심하게는 하나님 앞에 혹시라도 죄를 짓는 일이 있다할지라도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디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안 버리지 않습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늘 함께 하십니다. 야단칠 때는 야단치실지라도, 때릴 때는 때릴지라도 늘 함께 하십니다. 믿음이 있으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설명해도 안 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공통된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와 ‘특별히’ 함께 해주시는 것을 바라는 소원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떠할지라도 ‘특별히’ 나와 함께 해주시고, 내가 좋을 때는 물론이고 정말로 어렵고 힘들 때 ‘특별히’ 함께 해 주시기 바라는 것이 모든 기독교 신자들의 소원입니다. 적어도 이 문제는 그리고 나는 받아주셨으면 좋겠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해주시고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받아들여지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너무도 기본적인 욕구인데 이 욕구는 상당히 강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될 때 인생자체가 비뚤어지게 되고 이것이 제대로 되면 인생이 올곧게 가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전부다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기 원합니다.


어느 TV에서 모계사회를 보았는데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결혼을 해도 남편이 아내와 함께 같이 살지 못합니다. 남편은 너무 너무 중요한 어머니와 같이 살아야하고 아내를 보고 싶어도 마음대로 가지도 못합니다. 아내가 싸인을 하면 한 달이나 두 달 혹은 석 달 만에 가는데 대문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담을 넘어가서 살짝 아내만 만나고 옵니다. 자기 아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그런 모계사회에서도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아무 역할도 없고 아닌 말로 구실도 제대로 하지 못하더라도 그러나 그런 남편의 사랑을 못 받는 아내들은 너무너무 속상해하고 사랑을 받는 아내들은 너무나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남편들은 또 어떻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할지라도 내 아내에게만큼은 인정받기 바라고 존경받기 바랍니다. 그래서 혹시 남편이 세상에서 제대로 못할 때는 아내들은 그것이 다 내 책임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내가 남편을 인정해주지 않고 자존감을 채워주지 못해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해야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서 나를 인정해주시고, 우리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받아들여졌을 때 자존감이 강해집니다. 그리고 자화상이 아주 건강해집니다.

아주 중요한 것이 자화상입니다. 자화상에 대해서 잘 설명하려면 매우 어렵지만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습이라고 말하면 쉽게 설명이 되겠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화상인데 이 자화상은 인생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실제 어떤 사람인가와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과 관계없이, 내가 나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자화상에 따라서 살게 됩니다. 본래 있는 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자기의 모습,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그 모습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자신의 모습과는 별개입니다. 객관적인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또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 대해서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은 자기를 상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로 상당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나는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이 중요한 자화상을 건강하게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받아들여진다'는 의식’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받아들여주시는구나, 내 아내가 나를 존경하고 내 아내가 나를 인정하는구나.’ 이런 의식입니다. 그래서 남편들이 세상에서 힘들고 어렵고 위 사람에게 눌리고 옆 사람에게 치이고 아래 사람에게 거꾸로 당하는 일이 있어도 아내가 인정해주면 얼마나 힘을 얻는지 모릅니다. 영 다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합니다. 아주 건강해집니다. 자신감이 생깁니다. 안정이 됩니다.

반면에 이 받아들여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안정이 잘 안됩니다.
공부를 해도 성적이 잘 올라가지 않습니다. 이상합니다. 먹어도 소화가 잘 안됩니다. 학생들의 성적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의 성적에는 중요한 세 요소가 작용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집중력입니다. 집중해서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당연합니다. 나머지 두 가지는 받아들여짐에서 나오는 안정감과 자신감입니다. 이만큼 받아들여진다는 인식은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의 아주 좋은 예가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사복음서 중에서 제자 요한을 ‘사랑받는 제자’라고 표현하는 곳이 있습니다. 4복음서 중에서 단 한군데만 있습니다. 요한을 두고 사랑받는 제자라고 하는데 요한복음입니다. 요한 스스로 자기를 가리켜서 사랑받는 제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참 재미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을 편애하셨을까요? 성경보시면 요한이 다른 제자보다 더 사랑받을만 하던가요? 성경에는 그런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요한을 다른 제자보다 더 사랑하시는 것 같다는 느낌도 별로 들지 않습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늘 자기를 가리켜서 나는 사랑 받는 제자라고 말하였고 복음서를 쓸 때도 그렇게 썼습니다.

어떻게 보면 좀 모자라는 것 같지만 나는 사랑을 덜 받는 사람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차라리 낫습니다. 나는 남편에게 또는 아내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사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나는 사랑받는 아내다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이런 사람이 실제 사랑을 더 받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무엇보다 건강해집니다. 소화도 참 잘 됩니다. 희한하게도 사도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 사도요한입니다. 열 두 제자, 열 두 사도 중 다른 분들은 전부다 일찍 요절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힘들게 돌아가셨는데 사도 요한은 백 살 가까이까지 살았습니다. 이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일 수 있습니다. 자기는 사랑받는 제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특별히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하여 자기가 사랑받는 제자라고 했다면 이 사람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습니다.
내가 사람에게 사랑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의 일치됩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람에게도 사랑받는다고 생각하고 실제 또 사랑받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에 대해서 거울을 보고 “참 괜찮게 생겼다. 나는 참 사랑받을만한 사람이다.” 라고 말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들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도록 “하나님, 저 괜찮지요?” 라고 말씀해보십시오. 그러면 실제로 그렇게 살게 되고 정말로 그렇게 살아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여짐에 대해서 약합니다. 이것을 못합니다. 반대로 버림받는 데에 대해서는 아주 예민합니다. 조그마한 일만 있어도 나를 버리는가, 나를 싫어하는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가를 생각합니다. 이런 경향은 기독교 신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네가 어디를 가든 내가 너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잘 믿지 않습니다. 아마 그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내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내 사랑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셔서 큰 결심을 하셨습니다. 내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보이는 하나님으로 있어야 되겠다고 판단하시고 결단하셨습니다. 성탄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대단히 큰 영광입니다. 잠시 잠깐이 아니라 영원토록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것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주님께서 이것을 결심하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1서 4장 10절에서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으십니까?

각자가 대답하십시오.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 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실 때 이미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실제 임마누엘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실제로 여러분들과 함께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권세와 능력은 곧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 이 능력과 권세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 까닭은 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물에 물고기들 사이에 이런 질문이 오고갔습니다. “우리 생명이 물에 좌우되는데 도대체 물은 어떻게 생겼기에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이야기 끝에 한 물고기가 큰 바다에 가면 모든 것을 잘 아는 학자가 있다고 하는데 가서 한 번 물어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몇 몇 대표 물고기들이 바다에 있는 학자 물고기를 찾아서 물었습니다. 자초지종을 잘 들은 그 늙은 학자 물고기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어찌 자네들에게 물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겠냐만 이것만은 확실하다네. 자네들은 물 안에서 생겨났고, 물 안에서 움직이고, 물 안에서 살다가 물 안에서 죽는다네. 자네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모두가 물이라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 신자들과 늘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들과 늘 함께 하십니다.

이것을 보여주시고 또 확실하게 하시고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또 해마다 새롭게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해마다 오시는 까닭은 우리 인생들은 배워도 배워도 알지 못하고 잊어버리기 때문에 이것을 아시고 주님께서 해마다 다시 오십니다. 이미 와 있지만 다시 한 번 알도록 하기 위해서 또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시 하나를 보면서 다시 생각합니다.

Footprint in the sand, 모래 위의 발자국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네.
주님과 함께 바닷가 거니는 꿈을 꾸었네.
하늘을 가로질러 빛이 임한 그 바닷가
모래 위에 나는 두 짝의 발자국을 보았네.
한 짝은 내 것
또 한 짝은 주님의 것

거기서 나는 내 인생의 장면들을 보았네.
마지막 내 발자국이 멈춘 곳에서....

내 삶의 길을 돌이켜 보았을 때
자주 내 삶의 길에
오직 한 짝의 발자국만 있는 것이 보였네.
그때는 내 인생이
비참하고 슬픈 계절이었네.

나는 의아해서 주님께 물었네.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 때
주님은 저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러나 보십시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을 때
그때 거기에는
한 짝의 발자국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지요?"

주님께서 대답하시었네.
"나의 귀하고 소중한 이여,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너를 결코 떠나지 않았단다.
네 시련의 때,
고통의 때에도.....
네가 본 오직 한 발자국
그것은 내 발자국이니라.
그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메리 스티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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