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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명예의 전당 (창세기 24:1-9) 조회수 : 26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7-05-07

명예의 전당

창세기 24:1~9

어른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그 느낌이 좋습니다. 말 자체도 좋지만 어른이 어디에 계신다고 생각하면 훨씬 좋습니다. 그 중에서도 좋은 어른 혹은 큰 어른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늘 아쉬움이 많습니다.

좋은 어른, 큰 어른을 가졌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나라에 그런 어른이 계신다면, 이 사회에 그런 어른이 계신다면 참으로 축복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에는 반드시 이런 어른이 있어야합니다. 가능하다면 가장이 그런 일을 해주어야하고, 혹은 어머니가 그런 일을 해주어야합니다. 적어도 한 분은 있어야합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어른이 되시는 복을 받으십시오. 거기다 좋은 어른, 큰 어른이 되는 복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이 복을 나누어주십시오. 할 수만 있으면 여러분들이 이 나라에, 국민들에게 그런 좋은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저기 어른이 있다, 큰 어른이다. 참 좋은 어른이다.' 라는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을 보고 그리는 그림을 가지고 한 평생 살면서 그 그림보다도 더 좋은 어른이라는 그림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몇 명의 위대한 어른들이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어른, 그리고 출애굽을 인도한 모세라는 어른, 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원한 왕 다윗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왕은 없습니다. 그저 다윗입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다윗 같은 사람이 일어나서 조국 이스라엘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엘리아라는 위대한 어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 당연하게 엘리야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그림과 이런 비전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나름대로 이런 어른, 저런 어른이라는 그림을 가지고 삽니다.

이스라엘의 어른 가운데 첫 번째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을 그렇게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어떤 비전을 보여주시며 어떤 이상(理想) 상을 주시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은 이 말씀이 별 말씀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너 죽으라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는 약육강식의 시대라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짐승들이 그러는 것처럼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빼앗아가는 시절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고 일가친척을 떠나는 것은 곧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황당하다는 말 외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일반상식이나 일반 계산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이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아버지라고 항상 믿음을 잘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실수하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도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실패를 했습니다.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집트로 갔습니다. 가나안에 먹을 것이 없었으므로 이집트로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인도하고 보호하셨으므로 또 지켜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고 아내를 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다 끔찍한 고생을 했습니다.

여기에 참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인생은 실수할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일 후, 그냥 넘어지고 자빠지고 주저앉고 마는가, 좌절하고 실망하고 물러서고 마는가, 아니면 이것을 딛고 일어서는가? 입니다. 위대한 사람은 바로 여기서 차이가 납니다. 사업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실패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 때문에 무너지고 마는가, 아니면 그만큼 수업료를 지불했으니 다시 일어서야하겠다 생각하고 일어설 수 있는가?’ 입니다.

아브라함은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믿음의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아무것도 겁낼 것이 없다는 위대한 진리를 얻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그 하나님께 나의 생명을 맡기지 못하고 내가 내 생명을 구하려고 거짓말 시킨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만 나와 함께 하신다면 바보 같은 인생이지만 뭐든지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커다란 것을 배웠습니다. 이 정도 배우면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실수해도 괜찮습니다. 수업료를 지불해도 좋습니다.

이것을 배우면 모든 사람이 다 죽는다고 아우성 칠 때에도 얼마든지 큰소리 칠 수 있습니다. 자연 환경적으로, 경제 환경적으로, 가정 환경적으로, 육체적인 환경적으로 좌절적인 장애가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된다는 믿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웃을 수 있고, 큰소리 칠 수 있는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멋진 인생입니다.

일이 잘 안 된다고 힘들어하고, 몸이 좀 안 좋다고 뒤로 꽁무니 빼는 모습은 얼마나 초라한 모습입니까? 반대로 이것 저것 다 상관없이 나는 하나님만 함께 하면 된다고 큰소리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이런 어른들이 좀 나와야합니다. 이 사회에 이런 어른들이 없기 때문에 배울 데가 없어서 아이들이 못된 짓을 골라가면서 합니다. 어른들이 먼저 추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어른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아이들보다 더 못한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그 모습을 따라 해서 못된 일들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만 함께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아버지도 한 번 실패로 끝나지 않고 또 실패를 했습니다. 믿음의 큰 실패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지만 그 하나님을 끝까지 믿지 못합니다. 아내의 말에 흔들리게 됩니다. 어쩌면 은근슬쩍 기다렸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아이를 낳아줄 첩이 있어야 되겠다고 말하는 아내의 말에 그대로 넘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쓰라린 실패의 아픔을 바탕으로 또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믿음의 재도약을 이루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나름대로 믿음이라고 했던 것들이 진짜 믿음이 아니고 감정적인 믿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참된 믿음이란 잠시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하지 아니하고 쭉 이어오는 믿음, 아무리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믿는 믿음, 이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브라함이 기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짜인지 걱정스러웠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자식을 바치라는 말씀으로 시험하셨습니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자식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랬다 할지라도 그 아들을 바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말이 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이 바칠 준비를 해서 이삭을 데리고 출발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내가 들은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다면 어떤 것이라도 심지어 내 자식을 바치라는 것도 순종하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분이더라는 경험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한 나를 사랑하시듯이 내 자식 내 아들을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내가 내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훨씬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말도 안 되는 말씀이라면 하셨을 리가 없다, 무엇인지 몰라도 우리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이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로서 아브라함은 드디어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고 믿음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의 아버지라는 명예의 전당에 등극한 아브라함의 말년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자부를 보기 위해서 하인 한 사람을 부릅니다. 자기에게 맹세하라고 말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맹세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자부 될 사람을 이 지역에서 구하지 말고 고향 땅에 가서 구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자부 될 사람을 물색하라, 이런 사람을 찾아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서 자네가 보고 선택하고 결정해서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데리고 오면 그 처녀와 내 아들을 결혼을 시켜서 부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물론 그 하인이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내 며느리 될 사람을 심부름꾼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 있습니까? 가서 결정해서 데리고 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 믿음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 하인을 어떻게 그렇게 믿고 보낼 수 있었는지 정확하게 보아야합니다.

우선 그 믿음은 종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식 평생의 일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를 그렇게 최고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내 자부 문제도 틀림없이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믿을만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설사 그 사람이 전적으로 신뢰할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좋은 사람을 반드시 골라서 보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드온을 보겠습니다. 기드온이 전쟁에 나갈 때 무기로 횃불과 항아리, 나팔을 들고 나갔습니다. 군인도 몇 명 데리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밤중에 횃불을 들고 나가면 상대방이 깜짝 놀라기 때문일까요? 그 정도도 예측하지 못하고 전쟁에 임하는 적군이 있겠습니까? 항아리를 들고 가면 커다란 소리가 나기 때문입니까? 전쟁할 때 그 정도 소리가 나지 않겠습니까? 또 전쟁할 때는 다 나팔을 붑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승리를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냥 빈손으로 전쟁에 나가기는 뭐해서 아무거나 들고 나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을 한다, 승리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누가 가도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그 사람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7절에서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주의하고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냥 막연하고 자기 혼자 마음대로 믿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데 꼭 해주십시오. 반드시 해주십시오. 믿습니다.’ 이런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하게 보아야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다시 7절을 보겠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다!아브라함은 지금 겨우 아들 하나 보았습니다. 그 아들이 넓은 땅을 관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손이 생겨야하지 않습니까? 자손이 생기려면 그 아들에게 배필을 주셔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아들까지 주셨으므로 당연하게 며느리까지도 챙겨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믿음,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반드시 당신의 말씀을 이루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바보 같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내 아들에게 꼭 알맞은 며느리가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좋은 며느리가 아닙니다. ‘뛰어난 며느리가 아닙니다. 내 아들에게, 우리 집에 꼭 필요한 며느리를 구해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보겠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 가서 온갖 고생을 다했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팔리는 서러움, 노예가 되는 서러움을 당했고,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지만 정직한 자기에게 돌아온 것은 감옥에 가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감옥 속에서 만난 술맡은 관원장이 억울함을 챙겨주겠다고 그렇게 맹세하고 다짐했지만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이집트에 갔어야 했고, 감옥에 갇혀야했습니다. 전부 다 작정하신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연출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거룩한 일을 위해서 당신의 자식들에게 고생도 시키십니다. 좋은 길로만 가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사울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셨지만 입지가 좋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사울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입지를 세우시려고 가만히 있는 암몬이라는 나라로 하여금 전쟁할 마음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암몬이 그래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네들은 죽었다고 아우성칠 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하던 사울로 하여금 전쟁에서 대승하게 하셨습니다. 그때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도 일하십니다.

다윗을 볼까요? 다윗이 어릴 때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셔서 왕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도저히 피할 길이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옆 나라 블레셋으로 하여금 전쟁을 일으키게 하여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 다윗을 쫓던 사울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꼭 우리가 나서서 다 해야합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견디다 못한 다윗이 블레셋이라는 나라에 망명을 갔는데 더 난감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기 조국, 이전의 자기 부하들, 자기 백성들과 싸울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처지의 다윗을 블레셋 왕이 갑자기 불렀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선봉에 세우려고 할 것이라는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왕은, 다윗을 이 전쟁의 선봉에 세워 원수를 갚게 해주고 싶지만 자기 신하들이 다윗과는 함께 전쟁에 나가지 못하겠다고 하니 미안하지만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윗이 블레셋 왕에게 전쟁에서 빼달라는 부탁을 했다면 곤란한 일이 생길 텐데 오히려 블레셋 왕이 빠져달라고 미안한 듯 부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믿음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으로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조카 롯을 위해서 하나님만 믿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조카와 땅을 나눌 때 하나님을 믿고 땅을 주었습니다.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경우의 수를 뛰어넘어 하나님은 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신다는 믿음으로 이삭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이 그림을 한 번 그려보십시오. 어느 날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에 있는 명예의 전당 안에 들어갔을 때 그 안에 여러분의 이름이, 여러분의 사진이 있다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이 그림을 가슴 속에 담고 살면서 아름다운 어른이 되어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보여주시는 여러분이 되시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향하는 하나님의 소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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