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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이상한 기독교인들...(마태복음 5:43~48) 조회수 : 142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6-11-08

이상한 기독교인들...

마태복음 5:43~48

약간 모자라는 두 형제가 난생처음 자기 마을을 떠나 다른 동네로 갔습니다. 동생이 하늘의 달을 보고 , 이 동네에도 우리 동네와 같은 달이 있네...” 라고 말하자 형은 아니야 잘 봐. 이 동네 달은 우리 동네 달과 달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에 형을 존경하는 동생은 , 정말.. 우리 동네 달과는 다르네.” 라고 말합니다.

동생이 전봇대 위에 써놓은 불조심이라는 글자를 보고 형에게 무슨 말인지 묻습니다. 동생과 마찬가지로 글자를 모르던 형은 머뭇머뭇하다 “‘전봇대라는 말이야.” 라고 대답합니다. 조금 더 가니 전봇대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번에는 전봇대 위에 낙서금지라는 글이 있습니다. 또 형에게 묻자 형은 자신만만하게 전봇대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난형난제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15:1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많은 말들 중 하나가 43절 말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라고 한 가르침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구약 성경의 어디에서 본 것 같습니까? 성경에는 없습니다. 없는데도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있는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순 엉터리지만 희한하게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엉터리인줄 모르고 그냥 아멘하고 잘 받아들입니다. ‘아멘이라는 대답을 잘하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무슨 말이든 잘 믿으면 신앙이 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엉터리 말도 잘 믿습니다.

정말로 문제는 항상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자신 있게 가르쳤습니다. 때로는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는 일들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합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유대인들에게 우리 이웃은 유대인만이다, 이방인 즉 외국인은 다 우리의 원수다.’ 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외국인들이라도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기로 작정한 모든 사람들을 다 이스라엘로 받아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혈통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믿음,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신앙, 여호와 신앙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유대인들만이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 민족이고, 외국 사람들은 원수라고 가르치면서 동족인 유대인들만 사랑하고 외국인들은 원수로 여기고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더 큰 엉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고 가르쳤고 그것이 곧 충성이라고 가르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종교지도자들이 엉터리로 잘못 가르친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대인들은 같은 유대인이 아니면 다 미워하고 원수로 여겼습니다. 이방인들을 무조건 미워하고 원수로 여기는 것은 기본이었고, 나가서 외국인들을 미워하고 원수로 생각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고 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마땅하게 그런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과거에는 많았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좀 남아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나쁘지만 그런 피해를 입은 유대인들에게 전혀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이방민족들을 다 원수로 생각하면서 미워했고 다 오염된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이방인을 개라고 멸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라고 말합니다. 이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들, 외국인들과 똑같이 생각해서 개라고 말한 것입니다. 모든 외국인들을 다 개라고 멸시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아직까지도 상당히 많이 남아있습니다.

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 하나님 법에 어긋나는 일임에도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고, 그것이 곧 충성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큰 죄입니다. 지금 죄를 짓고 있고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고 있는데도 유대인들로 하여금 우리는 바른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고 착각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는 멸망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함께 망합니다. 나도 망하고 가정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고 사회도 다 망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자꾸 갈라지면 결국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이것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야합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때 특별히 갈라지지 아니하도록, 흩어지지 아니하도록, 서로 싸우지 아니하도록 많이 기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특별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후손들이 제대로 된 선생님, 좋은 선생님들에게 잘 배울 수 있도록 많이 기도해야합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이 기도하고 난 후, 가르치는 자, 선생이라고 하는 자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내가 바른 선생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 피차를 위해서 좋습니다. 나라를 위해서도 좋고, 자기를 위해서도 좋고, 배우는 학생들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배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지금 나를 가르치고 있는 그 선생이 바른 선생이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면 차라리 그 선생을 떠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떠나야합니다. 너무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너무 좋다는 것은 결국 내가 좋아라고 하는 것이고 내가 잘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닐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44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43절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신 후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그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44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말씀은 아주 명확합니다. 내 이웃 즉 유대인들이 이웃이라고 하는 같은 유대인들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방인들, 외국인들도 사랑하고 나가서 여러분들을 박해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상당히 적극적입니다. 얼마나 앞서나가는지 모릅니다. 뒤로 물러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주님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39절 말씀에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라고 말씀하셨고, 40절에는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없어도 되는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겉옷까지도 벗어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41절에는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라고 말씀하셨고, 42절에는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도 참 대단하고 상당히 힘든 일입니다. 정말로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것은 소극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요청이 있을 때 내가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오른편을 쳐야지 왼편을 돌려 댈 수 있고, 속옷을 달라고 해야지 겉옷을 줄 수 있고, 오 리를 가자고 해야지 십 리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단한 사랑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사랑입니다.

주님은 그것도 어렵겠지만 거기에 그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늘 할 수 있을지 없을지 헤아리다 보니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아예 큰 것을 본다면 작은 것은 쉽게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뛰어넘어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 외국인들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되었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원수라고 말하는 외국인들,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심지어는 여러분들을 힘들고 어렵게 하고 괴롭히고 속상하게 하는 그런 사람들까지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가르침이고 우리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나가야할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조금 더 나은 것 정도에 머물지 말고 뛰어가십시다. 훌쩍 뛰어넘으십시다. 무언가 좀 상당히 다른 기독교를 지향하고 그런 교회를 지향하십시다. 도토리 키 재기 하지 말고 훌쩍 뛰어넘으십시다. 쉽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다, 쉽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 신자들의 삶의 원리를 잘 몰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제대로 안다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우리 기독교 신자들의 삶의 원리 두 가지를 봅니다.

하나는 기독교 신자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의 근거를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근거로 합니다. 이 일을 하면 내가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어려울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 하기 싫은 일인지 생각합니다. 요즘 특히 많이 그렇습니다. 그저 재미로 하거나 이기적인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얼마나 큰 문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런 일들은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도 없고 부모도 없고 그러다 나라도 없습니다. 그저 나만 있게 됩니다. 그러다 내 아내도 없고, 내 남편도 없고 더 나가면 내 자식도 없게 됩니다. 아주 큰 문제입니다. 내 자신에게서 근거를 찾을 때 그런 문제가 생겨납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내 자신에게서 근거를 찾을 것이 아닙니다.

또 기독교 신자들은 상대방에서 그 근거를 찾을 것도 아닙니다. 저 사람이 내 이웃인지 아닌지, 내 동족인지 이방인인지, 저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인지 아닌지, 착한 사람인지 아닌지 상대방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상대방이 과거에 나에게 어떻게 했는가? 나를 도와주었는지 나에게 해를 끼쳤는지 또 나와 관계가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 나에게 친절한 사람인가? 불친절한 사람인가? 기독교인들은 이런 것을 근거로 하지 아니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의 행동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서 그 근거를 찾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이 근거가 되어야합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이신 우리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44)..’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내 원수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이지만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 나를 너무도 괴롭힌 사람, 그런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무조건 따라가는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 알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전부다 옳기도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다 좋더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아닌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했더니 좋더라는 인류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삼아야할 행동의 근거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그 근거를 삼아야합니다.

두 번째 기독교 신자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세상의 흐름이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안타깝게도 현금의 기독교 사회, 기독교인들, 교회들은 세상을 너무 잘 따라하고 세상 흐름을 잘 따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큰 슬픔이고 아픔이고 괴로움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흐름은 옳든 그르든 간에 많은 사람이 옳다고 하면 그것이 다 옳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아무리 옳아도 세상의 흐름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심지어 재판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재판하는 것들을 보면서 걱정스러울 때가 참 많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열에 열 사람, 만에 만 사람 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아닙니다. 우리 삶의 기준은 하나님이고 하나님 말씀입니다. 여러 사람이 다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맞는다고 말씀하시면 맞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옳다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그 앞으로 뛰어나가야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23:2)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세상의 흐름이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기준은 오로지 하나님이고 하나님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아주 미묘하고 어려운 질문 하나를 예로 드리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재판관이라면 여러분 앞에 아주 가난한 사람이 악한 죄를 지었을 경우 어떻게 재판할 것인지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은 재판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보다 여론의 흐름이 동정 쪽으로 흐르면 여지없이 동정으로 흘러갑니다. 관용을 베풀어야하다는 쪽으로 흘러가면 모든 사람들이 아주 당연하게 관용을 베풀어야하는 쪽으로 흘러갑니다. 마치 법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처럼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흐를 때 한없이 그렇게 흐릅니다. 상당히 많은 경우에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독교인들도 불쌍한 사람은 불쌍하게 여겨야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감옥에 들어가고 그 가족들의 생계가 곤란하다면 동정해야합니다. 불쌍하게 여겨야합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불쌍하게 여겨야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무조건 감정적으로만 처리하시지 않습니다. 아닌 것은 분명히 아니라고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23장에서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23:3)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들을 위한다고 무조건 한편으로 치우쳐서 재판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우리 주님께서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나느니라(5:37) 라고 친히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옳으면 옳다 아니면 아니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이 감옥에 가면 처자식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재판은 재판대로 제대로 하고 돈을 모아서 그 사람이 살도록 해주어야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상한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저 사람들은 때로는 사랑이 많은 것 같고 자비로운 것 같은데 때로는 많이 냉정하다는 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저 사람은 다 좋은데 희한하게 이것만큼은 정말로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바른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만약 기독교인들의 모든 것이 세상 사람들 마음에 든다면 여러분은 바른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세상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공통적인 부분도 있지만 많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 마음에 꼭 들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 마음에 자주 들지 않아야합니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데 좀 이상하다는 말을 들어야합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세상의 기준이 다를 때는 우리는 세상의 기준, 세상의 흐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법을 선택해야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무언가 좀 다릅니다. 무언가 좀 이상합니다. 때로는 좀 많이 이상합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 법을 선택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선택하기 때문에 무언가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도 많이 받고 칭찬도 많이 받고 존경도 많이 받으십시오. 우리 교회도 그러해야합니다. 그러나 아닌 것을 분명하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참된 기독교 신자이고 참된 기독교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것만 안 하면 된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들에게도 그러했습니다. 다 좋은데 그것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그리고 사도들은 하지 말라고 한 그것을 하다 죽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이고 기독교인이 가야할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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