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에스라강단
  제  목 : 룻기(1) / (룻기 1: 1~14 ) 조회수 : 6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7-10-24

룻기(1)

룻기 1: 1~14

오랜 옛날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을에 심한 흉년이 들어 살 길을 찾아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아내 나오미 그리고 두 아들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갔는데 그곳은 이방민족이 사는 모압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이방민족이 사는 땅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나는 이제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엘리멜렉의 상황이 정말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성경을 읽어보면 꼭 떠나야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또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정 이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을 것도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일시적인 것이 되었어야합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의 가족은 1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떠나서 이방 땅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이것은 유대인들로서는 하나님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나오미의 남편 그 집의 가장 엘리멜렉이 죽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병이 들 수 있고 사고가 날 수 있고 죽을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도 마찬가지이고 신앙이 좋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혹시라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징계하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합니다. 혹시 지나친 면이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에 상당히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항상 이것을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나 남은 아내 나오미는 남편보다 한 수 더 뜹니다. 나오미는 늘 자기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만 찾아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방인을 며느리로 맞이하였습니다. 그것도 한 사람만이 아니라 둘 다 이방인 며느리였습니다. 나오미는 이 찜찜한 일을 너무나 쉽게 했습니다. 둘이나 이방 여인과 결혼시켰습니다. 그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 죽음에 이어 두 아들이 다 죽습니다. 그것도 자식 하나 없이 다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강력하게 그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저 좋은 것만 찾고 쉬운 것만 찾는 것입니다. 사람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할 사람을 찾는데도 동가식서가숙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하는 모습인데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도 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정말로 그것이 인정될만한 충분한 사유가 있다면 몰라도 그 정도라면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성경은 모압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을 분명하게 금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엄격하게 규제하는 것은 가나안과 사람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무언가 찜찜합니다. 절대 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야곱의 형 에서가 가나안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야곱과 에서의 부모 이삭과 리브가는 근심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율법이 없을 때였습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결혼하지 말라는 율법이 없을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모들은 그것 때문에 근심을 많이 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웬만하면 이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나오미도 이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혼을 시켰다는 말입니다. 찜찜한 일인 것입니다. 세상 살다보면 찜찜한 일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찜찜한 것은 어떻게 하든지 피해야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세 남자는 다 없어지고 세 과부만 남았습니다. 인생 살다보면 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젊어서도 과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 집안에 남자는 한 사람도 없고 세 사람 모두 과부가 되었다는 것은 생각해야합니다.

이러던 차에 나오미는 고향 이스라엘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흉년이 끝났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데리고 함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각각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두 며느리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사양했지만 시어머니는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며느리를 사랑하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따라오면 젊은 두 며느리는 의지할 남편도 없고 재산이 없고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데 그런 곳으로 두 며느리를 데려간다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이런 좋은 마음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이 며느리들이 신앙이 얼마나 좋았든지 간에 여호와 하나님이 있는 시댁에서 살았습니다. 아직 모압의 신 가운데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을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면 고향과 고향 사람들이 그들을 기다리지만 또 하나 모압의 신, 이방신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그들의 신에게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15)

나님의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아들 딸들, 사랑하는 손자, 손녀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하나님이고 예수님입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며느리들이 자기를 따라가면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지만 그러나 그 하나님이 계십니다. 인생의 최고 행복, 행복의 근원인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 사실을 나오미는 확실하게 믿지 못했습니다. 이런 불신앙이 나오미에게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선택해야합니다. 자녀들이 주일날 교회에 가지 못한다고 했을 때 이제 그것은 너의 문제다. 너도 이제 다 컸으니 네가 선택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잘하는 것입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1주일에 한 번씩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포기하고 양보할 수 없으니 지켜야한다고 강력하게 말하는 어머니, 아버지..이 중 여러분은 어떤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내가 좀 고지식한 사람이 될지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법은 지켜야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모범을 보여야할 것인지는 여러분이 선택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대접하실 것입니다.

두 며느리 중 하나는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거절하고 끝까지 시어머니와 함께 가겠다고 했습니다. 룻의 이 선택은 세상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계산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선택이고 헌신의 선택이고 우리 기독교인이라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선택해야할 아름다운 선택입니다. 참 보기도 좋습니다.

거기다 하나 더 놀라운 것은 룻의 선택은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선택은 모압의 신을 이제는 완전히 버리고 포기하겠다는 선택이기 때문에 더욱 놀라운 선택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신뢰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혹 더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혹 당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다면 나는 좋다는 각오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반드시 기억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보상을 해주십니다.

드디어 나오미와 며느리 룻이 도착했습니다. 10년이 지나 돌아온 나오미를 고향사람들이 맞이합니다. 사람들은 반갑다고 나오미를 부릅니다. 이때 나오미는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고 합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은 기쁨이라는 것이고 마라는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괴롭다는 것입니다.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갈 때는 세 남자와 함께 갔는데 돌아올 때는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인생은 지금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의 끝은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을 내가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과거가 결정했지만 미래는 오늘이 결정합니다. 지금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서 미래가 다 결정되어지고 모든 결정체들은 오늘에 따라 갈립니다. 아무리 과거에 많은 복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오늘을 악으로 장식하면 내일은 망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과거에 아무리 악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오늘을 선으로 장식하면 내일은 행복하고 편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오미는 나오미가 아니라 마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내일은 달라질 것입니다. 이전의 나오미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나오미는 하나님을 몰랐지만 이제는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오미가 말합니다, ‘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21)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이제 나오미가 알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나오미의 내일이 달라질 것은 나오미에게는 이제 잃어버린 세 남자보다 더 복된 룻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이제 룻을 얻었습니다.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오미보다 더 큰 복을 받았습니다. 룻보다 더 귀한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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