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에스라강단
  제  목 : 언제나 노래할 수 있는 사람들 (사무엘하 6:1-15) 조회수 : 60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7-05-07

언제나 노래할 수 있는 사람들

사무엘하 6:1~15 ═══════════════════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죽고 사울과 다윗 두 집안 사이에 전쟁도 끝이 났습니다. 다윗이 통일 왕국의 왕으로 등극합니다. 다윗은 가나안 원주민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빼앗고 예루살렘 성을 다윗성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블레셋을 무찌르고 난 뒤 나라가 완전히 안정되자 다윗이 곧바로 제일 먼저 한 특별한 일이 있습니다. 법궤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궤를 모시고 오는 일입니다. 오래 전 블레셋에 법궤를 빼앗겼다가 어떻게 어떻게 다시 돌아 왔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귀히 여기지 않고 시골에 방치해두었습니다. 그 세월이 7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동안 아무도 하나님의 궤를 모셔와야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윗은 나라를 안정시키자마자 70년이나 방치되어있던 법궤를 모시고 오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다른 어떤 것보다 이것을 먼저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확인할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을 때에는 반드시 그럴 까닭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항상 무엇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반드시 특별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동안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 있던 법궤를 새 수레를 만들어 그 위에 모시고 옵니다. 이스라엘에는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나라의 모든 족속들의 대표들과 궁중의 모든 사람들이 다 나가서 즐거워하면서 기뻐했습니다.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연주하고 노래했고 다윗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춤추며 기뻐서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법궤를 한 참 모시고 오던 중 한 곳에 이르러서 법궤 수레를 모는 소가 무엇에 놀랐는지 놀라서 뛰었습니다. 그러자 법궤가 흔들렸습니다. 이때 법궤를 모시고 오던 웃사라는 사람이 흔들리는 법궤를 손으로 붙들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웃사를 죽여 버렸습니다. 웃사가 하나님의 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법궤는 사람의 손으로 만지거나 붙들어서는 안 되었는데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 일을 본 다윗은 무언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모시고 오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그 법궤를 일단 모셔놓았습니다.

그때 다윗은 아마도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는지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오벳에돔의 집에 법궤가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 집에 복을 내려주시는데 오벳에돔 뿐만 아니라 그 집안 모든 사람들이 다 복을 받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용기를 내어 다시 모시고 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동원해서 다시 모시고 옵니다. 이번에는 수레에 모시지 않고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왔습니다. 그리고 오는 길 곳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즐거웠던지 속살이 보일 정도로 하나님 앞에 춤추고 즐거워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일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을 하나 가르쳐주십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어떤 자세로 대해야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이 세상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부닥치는 문제입니다.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사업을 하면서도 이웃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주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을 살아가야할 것인가? 본문은 여기에 대한 답을 주십니다. 그 답은 한 마디로 말하면 경외입니다.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대해야합니다.

경외란 무엇인가요? 간단하게 하나님을 지극히 좋아하면서 한편으로는 지극히 두려워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고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 것은 알아야합니다. 좋아한다고 그냥 좋아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무엇을 하라고 하시고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지 알고 지키는 것, 이것을 경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그 기도 내용을 보면 아주 분명하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때 하나님을 부를 때 아빠라는 호칭으로 부르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로서는 약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마치 어린 아이처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인간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이어집니다. 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어린아이와 같이 기도를 시작했지만 예수님은 결코 당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뜻을 전적으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질 모습, 하나님 앞에 가질 자세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한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함께 있어야합니다. 혹시라도 웃사처럼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알려고 노력하지도 아니하고, 내 마음대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통해 어떤 것은 되고 어떤 것은 안 되는지, 하나님께서 어떨 때 기뻐하시고 어떤 것을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지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해야 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아들인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를 지내다 변을 당합니다. 제사를 지낼 때 불이 필요한데 그 불은 아무 불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불로만 제사를 지낼 수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늘 보아서 그랬던지 제사를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냥 아무 불로든 드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너무 쉽게 생각하고 다른 불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리다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을 팔고 헌금을 하였으니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부부가 3시간 만에 둘 다 죽고 말았습니다. 교회에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왜 거짓말을 했습니까?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앎, 그리고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있어야합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도 같이 있어야합니다. 두려워만 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지금 살아가는 환경, 형편, 여건들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남북한 위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겁을 내고 두려워한다고 할지라도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그럴만하면 이 나라에 평화를 지켜주시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믿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잘하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지켜주시고 내 딸과 내 아들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삶은 잠시면 지나갑니다. 지나가고 난 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완전한 평화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떤 환경이든 어떤 처지이든 한없이 행복할 수가 있고 행복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렇게 사십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참 슬픈 일이고 죄송한 일이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하면 참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부활할 것입니다. 새로운 몸과 새로운 마음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한없이 경건하면서도 한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면서 사십시다.

 "

  이전글 : 기적이 일어나는 곳 (사도행전 10:1~6)
  다음글 : 최고의 교육 (사무엘상 2:26)
이전글 다음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