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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로마서 9:1~3) 조회수 : 14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7-03-24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로마서 9:1~3

사랑에는 증거가 있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한다면 사랑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내가 그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증표가 있고,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때에는 반드시 거기에 따르는 아픔이 있게 되어있습니다. 그 사랑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바쳤는지 이것으로 그 사랑이 진인지 위인지 그 진위가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척이나 사랑한다고 많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정말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제가 하나님을 이처럼 사랑합니다.’ 라는 것을 자기 아들 이삭을 내놓음을 통해 보여주었듯이 하나님은 내가 너희들을 이처럼 사랑한다는 것을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증명하셨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배 바울은 하나님께 바칠 아들도 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들보다 딸보다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구원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을 담보로 하나님께 소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민족, 이스라엘 유대민족의 구원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참된 신앙인들 그리고 위대한 신앙인들은 모두 자기 민족을 사랑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느 날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귀찮을 정도로 집요하고 끈질기게 요청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소돔과 고모라성을 용서해주시겠습니까? 그 안에 의인 쉰 명이 있으면 용서해주시겠습니까?..다섯 명을 뺀 마흔 다섯 명..마흔 명..서른 명..스물 명..열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밉살스러울 정도로 달려 붙어서 요청합니다. 아브라함이 왜 그렇게 하나님께 밉상을 보이면서까지 요청했습니까? 물론 소돔과 고모라성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 소돔과 고모라성에 자기 혈족 조카 롯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오는 사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마어마하게 화가 나셔서 당장 유대민족들,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없애버리겠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서서 하나님 저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시옵소서라고 공갈협박을 하였습니다. 유대민족들, 이스라엘 민족들을 멸망시킬 바에는 나도 함께 멸망시켜달라고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덜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자기 멸망이 덜 두려워서도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 간에 자기 민족을 구원시키려고 하는 열망을 모세에게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고 있을 때 보고가 들어옵니다, ‘변방에 있는 그일라 라는 마을이 블레셋의 침공을 받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침공을 받게 되면 거기에 있는 모든 이들, 부녀자들까지도 엄청난 어려움을 당할 텐데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시 다윗은 자기 코가 석자였습니다. 아차 잘못하면 사울에게 잡혀 큰 변을 당할 처지였습니다. 부하들까지도 만류하였고 반대가 거셌습니다. 대장이라고 해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다 그일라 주민들을 구해주었을 때 그 뒤에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무엇이 있을 지까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일라 주민들은 사울에게 다윗을 고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워낙 악독하고 악랄하게 다윗을 쫓아다니고 있기 때문에 만일 저들이 고발하지 않으면 사울에게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를 고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다윗은 알면서도 그일라 주민들을 구원해줍니다. 내 백성, 내 민족, 내 형제이고 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평신도 지도자 중에 최고라고 일컬음을 받고 있는 느헤미야가 그랬습니다. 바벨론에 있던 그는 늘 조국의 소식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고 있으면서도 늘 조국과 민족의 소식에 귀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조국의 슬픈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완전히 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느헤미야는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울면서 음식을 먹지 않으며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내 민족 내 나라가 그렇게 된 것이 제가 그리고 내 집이 죄를 지어서입니다.’ 그 모든 것을 자기의 죄로 회개했습니다. 그 정도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조국 재건에 투신했습니다. 왕에게 조국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왕은 너무도 사랑했던 느헤미야이기에 그냥 보내지 못하고 유다의 총독으로 발령을 냈습니다.

드디어 조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월급을 받지 않았습니다. 자기 월급이 백성들의 세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총독은 월급을 받았지만 느헤미야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이 되기까지 반드시 무엇이 있습니다. 참된 기독교 신자들, 위대한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항상 무엇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주 큰 것 하나가 자기 나라, 자기 민족 사랑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합니다. 내 형제도 사랑해야하고 남도 사랑해야합니다. 내 민족도 사랑해야하지만 다른 민족도 사랑해야합니다. 그러나 내 가족, 내 형제, 내 민족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 다른 민족을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가까운데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멀리 있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자기 민족을 너무나도 사랑했습니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가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내 민족을 위해서라면 내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구원의 반열에서 구원의 생명책에서 내 이름이 없어질지라도 좋다. 어떻게 하든 간에 내 민족만 구원받기만 하면 좋다.’ 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도구로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게 나가기 전에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맨 처음 찾아간 곳이 회당입니다. 거기에는 이방인들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유대인이 있는 회당에 항상 먼저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방인들에게 나갔습니까? 유대인들은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울을 반역자라고 하면서 죽이려고 쫓아다닌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로 나갔습니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자기 민족 자기 조국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이든지 어느 나라의 기독교인들이든지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힘을 다해서 이 나라, 이 민족을 사랑하십시오. 모두가 각각, 각자가 선 그 자리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지켜야할 의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나라 이 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421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주님의 이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않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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